복음서를 읽으면서 36회
마태복음 9:27-312001. 10. 6. 강연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마태복음 9:27-31)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이 내용에는 두 소경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서로 참 잘 만난 것 같습니다. 소경은 소경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텐데, 소경들끼리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그 소경들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제가 한창 성경을 전하던 때, 신앙에 불이 붙었다고들 했던 스물네다섯 살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함께 기도해서 병자의 병을 낫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낫기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이 기도로 좋아지기도 했습니다. 진심으로 찾고 찾으면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교제 가운데 그러한 일들이 있었던 것을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께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고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여길 것인가 하는 마음의 싸움이 심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여러 말씀들을 살펴보면 병을 낫게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한 번씩 나타나는 표적이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도 어느 교회에 가면 병이 다 낫는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만사를 제쳐 놓고 병원 문 앞에 서 있으면서 병원에 들어가는 환자들에게 안수해서 병을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고 했으니, 누구라도 다 낫게 해야 할 것입니다.성경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귀신에 잡힌 여인이 며칠 동안 그를 따라다니며 바울이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계속해서 지적하며 애먹여, 견디다 못한 바울이 귀신을 쫓아낸 내용이 있습니다. (행 16:16-18 참조) 하지만 그런 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능력이 나타나는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옮겨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소경이 눈을 떴다는 내용을 보면, 제가 참 좋아하는 찬송가가 떠오릅니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나 그때에 확실히 소경이 눈을 뜨는 것 보았네그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나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그 동정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그 갈릴리 오신 이 그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못 자국 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신 말네 죄를 인함이라 하실 때 나의 죄 짐이 풀렸네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나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그 사나운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고 명했네그 물결이 주 말씀 따라서 아주 잔잔케 되었네그 잔잔한 바다의 평온함 나의 맘속에 남아서그 갈릴리 오신 이 의지할 참된 신앙이 되었네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나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이 세상에 살면서 시달린 모든 친구여 나오라그 놀라운 은혜를 받아서 맘의 평안을 얻으라나 주께서 명하신 복음을 힘써 전하며 살 동안그 갈릴리 오신 이 내 맘에 항상 계시기 원하네오 내 친구여 주 사모하세 부드러운 그 모습을곧 뵈옵고 오늘로부터 내 구주로 섬기세 (찬송가 84장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이 찬송가의 가사 가운데 한 소경이 눈을 떴다, 풍랑이 잔잔케 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은 영혼의 눈을 뜬 것을 말합니다. 이 찬송시를 쓴 사람은 자기 영혼이 거듭난 것을 하나님께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갈릴리를 다니시며 소경을 낫게 하시고 풍랑 속에서 잠잠하라 하셨던 것같이 마음속에 이는 폭풍과 괴로움도 잔잔한 바다와 같이 평안하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의 주인이 자기 속에 임했을 때, 소경된 영혼의 눈을 뜬 즐거움을 찬양하기 위해 이러한 시를 썼을 것입니다.하지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소경은 진짜 소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님, 자기 민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두 소경을 만났습니다.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자 종교 지도자들이 그 일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지만, 예수께서는 자기 할 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의 이 내용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논리적인 말씀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한복음 9:39-41)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참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도 소경인가” 하고 반문하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죄와 소경 된 것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또 이 내용과 요한복음 9장 1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 사람의 소경으로 난 것이 자기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예수께서는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9:1-3)
먼저 예수님은 소경으로 난 것이 죄와 상관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나중에는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입으로 두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왜 죄와 상관없다고 하신 것을 죄와 결부시켜 말씀하셨습니까?과학자나 의사들, 인체에 대해서 배운 사람들이 볼 때, 보지 못하는 것과 죄를 결부시키는 것은 허무맹랑하고 근거도 없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고전 2:14)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일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계기가 된 사건들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믿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