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유리스
3편 주먹에는 주먹으로
“...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굽기 21:23-25)
15장
“당신을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소.” 리베르만 박사가 말했다.
“고마워요. 떠날 때가 되니 마음이 너무 허전해요. 저도 이렇게까지 간 다프나에 정이 들어 버린 줄은 몰랐어요.”
“생각이 많이 날 거요, 키티”
“예. 나도 당신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질 거예요. 며칠 내로 아이들에 대한 서류 정리를 다 해 놓으려고요. 선생님과 같이 직접 살펴보고 싶은 아이가 몇 명 있어요.”
“물론 그래야지.”
키티는 일어서서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오늘 저녁엔 잊지 말고 평소보다 일찍 식당으로 와요.”
“그러지 말아요. 송별회를 열 만한 일이 아니잖아요.”
리베르만 박사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키티를 다시 불렀다.
“키티, 카렌은 어떻소?”
“몹시 괴로워하고 있어요. 감옥에 갇힌 도브를 면회한 후부터 계속 그래요. 어젯밤 에이커 감옥 습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더 심했어요. 도브가 그곳에서 빠져나왔는지는 나중에나 알게 되겠지요. 카렌은 평생을 두고 치러도 남을 만큼 고통을 많이 받았어요. 그렇지만 내가 미국에서 카렌을 아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어요.”
키티는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에이커 감옥 탈주 소식을 마음속에서 되씹어 보았다. 마카비의 남녀를 포함한 전사자는 20명이었고, 붙잡혀서 포로가 된 사람도 15명이나 되었다. 나타나지 않은 부상자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벤 모세도 이번 탈주 사건에서 전사했다. 단 두 사람의 생명을 위해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른 것 같았다. 그러나 아키바와 도브의 목숨은 두 인간의 생명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얼마 남지도 않은 영국군의 사기와 팔레스타인 탁치령을 지키겠다는 영국의 욕망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키티는 요르다나의 방문 앞에 섰다. 요르다나와 마주 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방문을 두드렸다.
“예.”
키티는 문을 열고 요르다나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요르다나가 차가운 시선으로 키티를 바라보았다.
“요르다나... 혹시 어제 도브 란도우가 무사히 탈출했는지 알고 있어? 카렌이 걱정을 많이 해서 혹시 알고 있으면....”
“모르겠어요.”
키티는 돌아서서 나가려다가 문 옆에서 발을 멈추었다.
“아리도 이번 사건에 참가한 거지?”
“아리는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일일이 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아는가 해서 물어 본 거야.”
“마카비 쪽 작전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프레몬트 부인, 설사 내가 무언가를 안다 해도 당신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부인이 팔레스타인을 떠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요르다나와는 친구가 되어서 헤어지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기회도 주지 않는구나.”
키티는 얼른 돌아서서 방을 나왔다. 축구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앙 잔디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조금 나이가 든 아이들은 잔디 위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간 다프나에는 꽃이 만발해 있지 않을 때가 없구나.’ 키티는 생각했다. 사계절 내내 공기 속에는 꽃향기가 배어났다.
키티는 사무소 건물의 층계를 내려와서 잔디를 가로질러 참호 옆을 지났다. 그리고 간 다프나의 동상 옆에서 발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아리의 죽은 애인에 대한 질투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동상은 훌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티의 마음속에 고독감이 갑자기 스며들었다.
“샬롬, 키티.” 아이들 몇몇이 옆을 달려가면서 키티에게 인사를 했다. 한 아이는 키티를 향해 달려와 매달렸다. 키티는 그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다른 아이들이 노는 곳으로 보냈다.
병원 건물로 가는 키티의 마음은 너무 우울해졌다. 간 다프나를 떠나는 것이 이렇게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키티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전에 있었던 고아원을 떠날 때는 이렇게 허전하지 않았는데.’ 키티가 간 다프나에서 정말 유대인들의 친구가 되어 보겠다고 노력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에 와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아리 벤 카난, 어쩌면 평생을 두고 마음속에 남아 있을 지도 모르는 사람!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 팔레스타인의 기억과 함께 아리 벤 카난의 모습도 흐려지겠지. 우울한 마음은 당연한 거야. 어떠한 직업이든 그것을 그만두고, 어떤 장소든 그곳을 떠나 다른 장소로 옮겨 갈 때는 후회 같은 감정이 생기는 법이니까.’ 하고 키티는 생각했다.
키티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키티의 방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키티는 숨막힐 듯 놀랐다. 문간에는 괴상한 옷차림의 아랍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머리에는 둘레가 흰 천으로 된 붉은 터키 모자를 쓰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검은 코밑 수염이 턱 끝까지 다듬어져 있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예, 들어오세요.” 키티는 아랍인이 영어로 말을 하는 데 놀라면서 대답했다.
아랍인은 방 안에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프레몬트 부인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나는 무사라는 드루스 족의 사람입니다. 드루스 족이라고 들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키티는 드루스 족이 회교도의 일파이기는 하나 유대인들에게 친밀하게 대한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었다.
“나는 하가나입니다.”
키티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리!”
“아리는 우리 마을 다리야트 엘 카르멜에 숨어 있습니다. 그가 에이커 습격을 지휘했습니다. 우리 마을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키티의 심장이 숨가쁘게 고동쳤다.
“심하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갈 수 있겠습니까?” 무사가 다시 말했다.
“예. 가지요.”
“약품은 휴대하지 마십시오. 조심해야 합니다. 영국군 도로 검문소가 여러 곳에 있는데 약품을 보면 의심할 겁니다. 트럭을 한 대 가져왔는데, 아이들도 같이 태워서 오라고 아리가 말했습니다. 내일 드루스 족 결혼식이 있으니 잔치에 아이들을 데려다 주는 길이라고 영국군에게 말할 겁니다. 아이들 열다섯 명을 불러내어 침구를 꾸리게 해주십시오.”
“10분 안으로 준비하겠어요.” 키티는 말하고 나서 리베르만 박사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간 다프나에서 무사의 마을까지는 좁은 산길로 해서 80km 정도의 거리였다. 낡아빠진 트럭은 느릿느릿하게 갔다.
트럭의 뒤에 탄 아이들은 예기치 않았던 외출에 마냥 즐거워하며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앞좌석에 키티와 함께 앉은 카렌만이 이 여행의 진정한 목적을 알고 있었다.
키티는 무사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키티가 확실히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아리가 24시간 전에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는 것, 걸을 수 없다는 것, 고통이 몹시 심하다는 것뿐이었다. 무사는 도브 란도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아키바의 죽음에 관해서는 일체 함구했다.
무사의 주의가 있기는 했으나, 키티는 설파제와 붕대, 살균소독약 등이 있는 작은 구급상자를 휴대했다.
키티는 큰 두려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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