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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복음서를 읽으면서 26회마태복음 8:1-42001. 7. 14. 강연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8:1-4)성경을 찾으라 하면 뒤적거리며 한참이 걸리는 사람들 중에 집에 가서 냉장고에서 시원한 것을 찾으라 하면 눈을 감고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집안 응접실에서 대강 어느 쪽으로 몇 발짝 가면 냉장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성경을 찾는 것도 어디쯤에 무슨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연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많은 책을 보고 많은 책을 가지지만 성경만큼 오래 가지고 살아야 될 책은 흔하지 않습니다. 성경만큼 우리 일생과 함께할 책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사도 몇 달 가지 않아 철이 바뀌면 입지 못합니다. 또 새 옷을 사면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만 몇 년 후에는 그 옷이 낡아지거나 몸에 맞지 않아져서 입지 못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성경은 오래 볼수록, 낡아지면 낡아질수록 더 마음에 즐겁다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는 성경 한 권을 쥐고 참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성경을 여러 권 가지고 차에도 몇 권, 책상 위에도 몇 권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어디쯤에 어떤 내용이 있고, 영어 성경 어느 쪽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바로 찾을 수 있게 항상 보면서 연습을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알아가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눈동자와 사물의 초점 거리가 맞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글자가 바로 눈앞에 있거나 너무 먼 거리에 있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성경을 읽을 때는 우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정해 놓아야 성경을 보고 이해하기가 쉽습니다.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5, 6, 7장을 거쳐 마태복음 8장 내용을 공부할 것입니다. 5, 6, 7장을 공부할 때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교훈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몇 번 등장할 뿐, 전부 ‘천국’이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는 완전히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유대인 아닌 이방 사람들이 보기 쉽게 내용을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에는 유대인들을 위주로 기록한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누가복음이나 마가복음, 요한복음의 말씀들도 당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고, 그들에게 철저한 교훈으로 주어진 말씀은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을 읽을 때는 구약성경을 연속해서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우리는 이제 마태복음 8장의 어떤 문둥병자 이야기를 읽을 것입니다. 그의 병이 나았고 그것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였다는 짤막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의 일이 왜 성경에 기록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신약성경에는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 롬 15:4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딤후 3:16 참조)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먼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조상을 모시지 않는 이방인의 입장에서 봅니다. 보되, ‘믿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처음 조상이면서, 유대 민족의 혈통을 이어 준 아버지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있는 갈대아 우르에서 멀리 가나안까지 하나님 말씀을 좇아서 이주해 왔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고 하신 하나님 말씀을 믿고 따라 그 땅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후손들을 낳았습니다.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서 본을 보였으니 그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했지만, 그들은 본받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롬 2:28-29) 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일지라도 확실하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으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하는 말은 유대인일지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아닌 이방인이면서 이 내용을 성급하게 생각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스스로 영적 유대인이 되었다고 자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쓰지만, ‘영적으로 유대인’이라는 말까지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유대인의 역사를 이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지만 영적인 후예가 있고, 육적인 후예가 있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영적 유대인에 대해서는 성경에 “남은 자” (롬 11:5), “적은 무리” (눅 12:32) 라는 말로도 표현되었습니다.그렇기에 이방인으로서 예수 믿은 사람이 스스로를 영적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면서 진짜 유대인들을 멸시하거나 짓밟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죽이는 데 동의하거나 앞장섰습니다. 유대인들을 너무 짓밟았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택함 받은 사람인 것처럼 떠들면서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셨다고 생각하며 유대인을 멸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을 끝까지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붙드십니다. 그 역사 속에 하나님이 해 놓으신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 내용도, 우리가 읽기에는 생소하지만 유대인이 읽을 때는 그들의 관습과 역사가 드러나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제사장에게 보여서 제사장의 명령과 가르침대로 따라야 하는 일들을 율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제사장의 위치에 대해서 영화에서 보았던 밀림의 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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