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데,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고 그 다음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으니, ‘좁은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 ‘협착하다’,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들어가라 했는데도 들어가는 이가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가복음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하는 자가 많다’고 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자칫 힘을 잘못 쓰면 그 길에서 낙오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만 구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낙오된다는 것입니다. 또 찾는 이가 적다는 말씀을 보면, 찾는 방법부터 잘못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우리 위치를 한번 다져 보아야 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없어도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인도자에 의해 그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마지막 날 눈을 떴을 때,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는 줄 알았더니, 내가 통과한 문은 넓은 문이었고 나는 넓은 길을 걷고 있었구나. 그것을 좁은 길로 착각하고 있었구나.’ 하고 슬퍼할 것입니다.
성경은 어두움과 빛, 두 가지를 분명하게 나누어 놓았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창 1:5) 고 했습니다. 빛이 비추었다는 말과 어둡다는 말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있어서 무언가를 보지 못했던 사람은 소경입니다. 성경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 15:14) 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소경이 빛과 상관없는 길을 걷고 있는데 다른 소경이 그 길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우리도 소경인가” 하고 질문했던 것처럼 우리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하고 답을 해 주셨습니다. (요 9:40-41 참조)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들, 자녀들, 부모님을 보면서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넓은 길을 가고 있고, 나는 좁은 길로 가고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복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거듭난 사람이 들어선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구원받았다고, 중생의 경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좁은 문에 들어서서 좁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토대로 보면, 어떤 복음 구절을 보고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좁은 문에 들어섰고 좁은 길을 가고 있다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는 말씀대로 믿어졌을 때 그 구절이 자기가 받은 구원에 대한 구절이라고, 위로의 말씀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성경을 살필 때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는 말씀처럼 ‘나는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자부심으로 그 구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 옛날에, 10년 전에, 아니면 5년 전에 그 구절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돌이켜보아도 아무 열매가 없는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이나 후나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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