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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태복음 7:13-20, 2001. 6. 30. 강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3-20)
좁은 문과 넓은 문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과 넓은 문에 대한 이 말씀을 보편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해라, 종교를 가져라, 혹은 복음주의자가 되라고 하면서 교인으로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고 좁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종교 생활을 하지 않거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말씀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배당에 불러 모아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함으로써 예수를 알아 가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 전체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평소에 알던 것과는 그 뜻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설교를 통해 자주 들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넓은 길을 가면 안 된다, 세속적으로 흐르면 안 된다, 세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으니 좀 더 적극성을 가지고 종교 생활을 해서 남보다 신앙적으로 더 앞서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좁은 길을 걷기 위해서 새벽기도나 산 기도를 가기도 하고, 기도 모임도 갖습니다. 교회 활동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기도 하고, 직분도 갖고, 전도하러 선교사로 나가기도 합니다. 복음에 이바지하겠다며 악착같이 번 돈을 헌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기독교 2천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로마 가톨릭이라고 하는 구교나, 구교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해서 열교, 혹은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신교에서는 이 말씀을 무수히 전해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 교회가 하나였을 때, 종교개혁, 즉 신교 자유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은 교회가 좁은 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넓은 문은 세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 자유 운동이 일어나고 신교가 생기면서 구교에서 나온 사람들은 교황청을 향해 넓은 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여러 나라에서 여러 신교 종파들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종파가 생길 때마다 정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좁은 문에 들어서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향해 넓은 문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좁은 문에 속해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이며, 그들이 비뚤어졌다고 비판하는 이들은 무엇이 비뚤어졌기에 이단이며 넓은 문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의로우신 재판장이 나타나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딤후 4:8 참조) 이 의로우신 재판장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딤후 4:1 참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모든 것을 판가름할 것입니다. 핍박받던 초대교회 사도들 중 한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은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행 24:14) 라는 말도 했습니다. 남들이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몰아붙이더라도 자신들은 이 도를 좇는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한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정확한 교리를 가진 교파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정통성 있다고 말하는 세속화 된 교회가 가진 힘에 맞서서 자기가 믿는 진리를 위해 죽음을 불사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가졌다는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6:2) 하신 말씀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교든 구교든 서로 싸우는 데 많이 지쳐, 상당히 타협하고 친화하는 방향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진리라고 주장한 그 ‘진리’의 선구자들은 희생 제물이 되어 새로운 교단이나 교파를 만들어 놓고 삶을 마쳤지만, 그것을 이어받은 후진들은 자신들을 핍박하던 자들과 타협하며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외의 타 종교의 가르침은 모두 넓은 길에 속한 것이라고 가르쳐 왔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서서히 풀어져 서로 다른 종교들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종교 지도자들은 각자 교파는 달라도 가는 길은 한 길이라며 상당히 듣기 좋은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과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좁은 길을 걷는 것이며, 어떤 것이 넓은 길에 서는 것인지를 성경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의 힘이 성경보다 위에 올라 있기도 합니다. 또 성경을 법이나 율법 같은 옛 교훈으로만 생각하고, 생활면에서는 성경이 아닌 사람의 규범이나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좁은 문이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지 않으면 좁은 문을 발견할 수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아닌 어떤 힘도 좁은 문과 넓은 문을 진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교단이나 교파와 맞지 않는 가르침에 대해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가차 없이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고 판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훗날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재판하시는 때에는 그 옳고 그른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몰던 사람이 도리어 이단이 될 수 있고, 이단이라고 취급받았던 사람이 정통이 될 수 있습니다. 신교가 구교를 비판할 때는 분명히 성경을 근거로 지적한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성경으로 지적하기가 상당히 난해해졌습니다. 신교 자체에도 문제점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신교나 구교 할 것 없이, 어느 종파 할 것 없이, 이단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나 이단이라고 지목당하는 사람들 모두 이 성경 앞에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좁은 문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문과 다르고, 넓은 문도 사람들이 상상하는 문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좁은 길도, 넓은 길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과연 내가 좁은 문을 통과해 좁은 길에 확실히 들어섰는지, 넓은 길은 피했는지 성경으로써 자신을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해서 좁은 문에 들어섰다, 좁은 길을 걷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실패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좁은 문을 통과했느냐 하는 확실한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좁은 길이 귀찮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좁은 길은 무언가 짐이 되고 무거울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걸으려 하면 부딪치는 것도 많고, 나 한 사람이 통과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이 말씀이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하는 자가 많으리라  (13:24)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도한다는 것은 인도하는 사람,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리로 끌어간다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제멋에 겨워 세속적으로 살다가 죽으면 멸망으로 간다는 말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인도자가 분명히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문에 끌려 들어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데,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고 그 다음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으니, ‘좁은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 ‘협착하다’,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들어가라 했는데도 들어가는 이가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가복음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하는 자가 많다’고 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자칫 힘을 잘못 쓰면 그 길에서 낙오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만 구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낙오된다는 것입니다. 또 찾는 이가 적다는 말씀을 보면, 찾는 방법부터 잘못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우리 위치를 한번 다져 보아야 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없어도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인도자에 의해 그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마지막 날 눈을 떴을 때,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는 줄 알았더니, 내가 통과한 문은 넓은 문이었고 나는 넓은 길을 걷고 있었구나. 그것을 좁은 길로 착각하고 있었구나.’ 하고 슬퍼할 것입니다.
성경은 어두움과 빛, 두 가지를 분명하게 나누어 놓았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창 1:5) 고 했습니다. 빛이 비추었다는 말과 어둡다는 말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있어서 무언가를 보지 못했던 사람은 소경입니다. 성경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 15:14) 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소경이 빛과 상관없는 길을 걷고 있는데 다른 소경이 그 길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우리도 소경인가” 하고 질문했던 것처럼 우리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하고 답을 해 주셨습니다. (요 9:40-41 참조)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들, 자녀들, 부모님을 보면서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넓은 길을 가고 있고, 나는 좁은 길로 가고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복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거듭난 사람이 들어선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구원받았다고, 중생의 경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좁은 문에 들어서서 좁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토대로 보면, 어떤 복음 구절을 보고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좁은 문에 들어섰고 좁은 길을 가고 있다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는 말씀대로 믿어졌을 때 그 구절이 자기가 받은 구원에 대한 구절이라고, 위로의 말씀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성경을 살필 때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는 말씀처럼 ‘나는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자부심으로 그 구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 옛날에, 10년 전에, 아니면 5년 전에 그 구절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돌이켜보아도 아무 열매가 없는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이나 후나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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