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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전도하는 마음으로 살자 2
이 소리는 ‘전도하는 마음으로 살자’ 1999년 7월 5일 저녁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명기 30:14)
성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생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상대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화가들이나 조각가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우리는 사람을 사귀면서 그 속마음을 알아갑니다. 또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친해지다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사람의 인격이나 교양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사귀면서 그 속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많이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보다는 성경이 우리 인간에게 하고자 하는 말,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읽는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왜 읽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영의 양식이니까 읽는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읽습니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읽는다고 했습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까이하며 사는 많은 종교인들은 영생은 사는 동안에 얻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영생을 누리는 것은 죽은 후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 있다면 죽음과 관계없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만, 지난 2천 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 죽은 사람들, 늙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지금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죽음과 동시에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영혼이 주님 품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것은 죽음 저편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까?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이 심판을 받습니까? 받지 않습니다. 영생은 이 세상에 살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저편에서 그것을 누립니다.그런데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죽은 후에 영생을 얻겠다고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살아서는 괴로움을 겪으면서 잘 믿어 보려고 애만 쓰다가 영생 얻었다는 확신도 가지지 못한 채 세상을 마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다 지옥에 간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진실히 믿고 영생을 얻었지만 그것이 영생인지 모르는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성경은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90) 고 말씀하십니다. 믿으면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영혼은 세상에 있을 때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부활 때는 육체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육체가 하나님께 영원히 구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구하시고 속하신 일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영생을 얻었는지 아닌지,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리고는 구원받기 위한다며 무조건 교회에 많이 출석합니다. 그런 혼란 속에 빠져 사는 교인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말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부유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왕 알게 된 바에는 정확하게 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 12:3)
이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별과 같이 영원히 비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옳은 데’는 어디를 말합니까? 각 종파마다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습니다. 여호와 증인들은 여호와 증인에 속하는 것이 ‘옳은 데’라고 생각하고, 몰몬 교도들은 몰몬교에 속하는 것을 ‘옳은 데’라고 합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옳은 데’가 자기 종파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큽니다. 가톨릭교든지 신교든지, 어느 교회든지 자기들이 믿는 종교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가 속해 있는 곳이 ‘옳은 데’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여 그러한 도취감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12장에서 말한 “옳은 데”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라고 스스로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빌라도도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요 18:37-38 참조)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종교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 영혼이 예수의 품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직 아버지 품에 안기지 않은 탕자와 같습니다. 아직 ‘옳은 데’로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법을 내가 배워 얻었네그의 말씀 의지하여 힘과 평안 얻었네영생수의 맛을 보고 보혈 의지합니다나의 생명 아낌없이 주께 아주 드렸네
나도 우리 주와 함께 못을 박혀 죽었네육신 정욕 억제하고 주의 뜻만 따르네한 번 주께 굴복한 후 성령 주장하시고주의 귀한 보배 피로 나를 정케 하시네
염려 주께 바쳤으니 주가 담당하도다걱정 근심 일용 양식 주께 모두 고하네기거 동작하는 것을 우리 주께 얻었고주의 맘과 사랑하심 내게 모두 주시네
(후렴)내 주 안에 거함으로 복된 말씀 듣고서크고 귀한 사랑 중에 항상 숨어 있도다  (복음성가 61장)
저는 목소리가 좋지는 않지만 이 찬송가를 자주 부릅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이 목소리가 좋아야만 엄마를 부를 수 있다면 세상에 ‘엄마’ 하고 부를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목소리가 좋든지 나쁘든지, 영어로 부르든지 한국말로 부르든지 그저 ‘엄마’라고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그처럼 우리도 이런 찬송가를 부를 때, 잘 부르려고만 하지 말고 ‘나의 삶을 이런 찬송으로 엮어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 어떤 시를 읽고 ‘이 사람 제 정신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읽은 시 내용이 이렇습니다.
생활이 즐거운 노래처럼 흘러 간다면행복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온갖 일 얽히고 답답한 중에도 얼굴에 미소 띄울 수 있다면더욱 보람 있는 생이라 하리니
저는 이 사람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를 읽고는, 항상 히죽히죽 웃는 미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후에 성경을 가까이하다가 어느 날 제 영혼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이 시가 사실로 믿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다고 했고 (고전 4:9 참조),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고 (고후 4:8 참조),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전 4:13 참조) 그런데 바울은 그런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며 살았습니다.저는 이런 내용들을 보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 얻은 구원이나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영생을 그저 값없이 넘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엄청난 것인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즐거워하든지 괴로워하든지, 삶에 만족하든지 불만이 있든지 살아갈 날들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우리는 하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끝을 맞습니다. 그런 인간의 삶에서 내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호흡을 이어가는 정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다가 마칠 것입니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받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할 절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는 줄 모릅니다. 생각도 못 합니다. 인간의 삶은 행복했든 불행했든 한 번은 끝나는데, 삶이 끝나기 전에 세상에서 해 놓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러 태어났습니까? 어느 시인들처럼 논하기 좋게 의문만 던지고 끝낼 것입니까?
너희는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세상돈도 명예도 사랑도 싫더라
무언가 세상을 포기한 사람 같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노래도 부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인생들을 향해 성경은 길을 찾으라고 뚜렷하게 말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뚜렷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무시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다른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말과 심판
우리 인간은 성경 앞에서 하나님께 정확하게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먼저 살펴보았던 다니엘서 12장의 내용처럼 성경은 우리 개개인의 인생의 끝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의 종말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가 그냥 평범하게 펼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사람도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또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컴퓨터 대란이 일어나 전쟁도 일어나고 폭탄도 터져 문제가 생길 것이라며 나라마다 대책을 세우느라 야단이었습니다. 또 어느 행성들이 일직선으로 설 때 지구에 대변화가 온다는 말도 있었고, 큰 위성이 지구에 떨어진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이 그런 식으로 망한다면, 여러분과 제가 믿는 성경은 틀린 것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본 세상의 마지막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성이 떨어져서 지구를 반쪽 낸다든지, 컴퓨터 대란이 일어나서 지구가 망하기 전에,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 날 때” (찬송가 470장) 하는 찬송가대로 우리가 변해서 올라가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7년 동안 환난이 있은 뒤 그토록 바라던 천년왕국이 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식의 종말이 온다면, 7년 환난도 거짓말이 되고 천년왕국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들도 모르고 천사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마 24:36 참조) 이 성경이 기록되고 오랜 역사가 흐른 후에 사람들이 이런 저런 예언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것들은 성경 내용과는 거리가 멉니다. 비슷하게 보이지만 속이는 내용입니다.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과정들은 성경의 약속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겁을 주시려고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은 성도들에게는 반가운 일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불러 가기 위해 세상에 오시는 것이고, 그 후 지상에서는 그리스도를 거역한 무리들에게 괴로움이 닥쳐옵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 세상에 어떤 종말론이 나올 때 우리는 한 번 더 심사숙고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니엘서 12장 내용에서는 종말이 온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때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갈지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다니엘 12:1)
대군 미가엘은 천사장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네 백성”은 유대인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살아남은 자들이 구원받는 일이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라는 말은 흙에 묻혀 산화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다가 불에 타서 죽었거나, 수한이 차서 늙어 죽었거나, 병들어 죽었거나, 폭사했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어떻게 죽었든지 모든 사람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원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라고 고상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땅의 먼지와 같이 죽은 사람들 중에 많이 깨어서 영생을 얻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라고 했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 사이에는 천 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영생을 얻는 것은 천년왕국 직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는 것은 천년왕국 후에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이에 천 년이라는 긴 기간이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0장 1절부터 15절까지 읽겠습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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