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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 되지 말라

- 전도하는 마음으로 살자 1
이 소리는 ‘전도하는 마음으로 살자’ 1999년 7월 5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얼마 전(편집자주:1999년 당시 강연 전) 몸이 상당히 좋지 않아 큰 고통 속에 있을 때에, 한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전도에 나설 수 있게 해 놓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전도하는 마음으로 살자’라는 공부는 꼭 해야 합니다. 전도는 어떤 정예부대같이 정해진 몇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확실히 안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께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하신 대로 이 빚을 꼭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영혼의 빚에 대해서, 성경에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전하지 않는다면, 또 전할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내 안의 죄성
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착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애써왔습니다. 그렇지만 제 속에는 성경을 밀어낼 만큼은 아니지만 죄성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나 길을 가다가 눈에 띠는 멋진 아가씨를 보면, ‘만일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을 저 아가씨가 알게 된다면 나를 어떻게 대하겠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마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정신 똑바로 차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좋지 않은 생각들이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마치 소설을 본 것같이, 영화를 본 것같이 그랬습니다. 내 눈은 바라보기만 하지만, 그 사람을 대하는 내 마음은 너무나 복잡했던 것입니다. 그런 제 모습을 후에 성경을 보면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실제로 저는 살면서 남들이 흔히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는 행동들은 손꼽을 만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속에는 죄를 행할 수 있는 힘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있습니다. 다만 사회가 지향하는 규율이나 법과 질서 때문에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문제에 한 번 부딪쳤는데, 신약 성경을 읽는 동안 또 한 번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1-22)
이 말씀을 보면서 저는 제가 살인죄를 짓지 않았지만 그러한 죄를 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살인죄를 저지를 만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꽤 착하게 살았습니다.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성경 구절에 있는 그대로 살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초등학생 때 정말 사랑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인데, 학교는 서로 달랐지만 제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모두 다 가진 그 친구를 저는 참 좋아했습니다. 제가 존경할 만큼 정말 깨끗한 아이였고 참 좋아했던 친구입니다. 그 아이도 자기에 비해 형편없는 저를 참 좋아해 주었습니다. 그 아이와 둘이 산에 가서, 그곳에 있는 묘를 등지고 앉아 ‘너는 커서 뭐가 될래? 나는 무얼 할 거다.’ 하며 훗날 자라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빵을 사다 주시면 잘라서 그 집에 가져가 나누어 먹고, 집에 돌아올 때는 그 친구가 나를 데려다 주고, 그러면 저는 다시 그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고, 그 친구는 또 저희 집까지 따라오고 했던, 정말 사랑했던 친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의 못된 아이가 그 친구를 때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저희 집은 6.25 사변으로 피난 와서 살던 상황이어서 잘 사는 축에 못 들었지만, 그 못된 아이의 집은 아버지가 의사여서 넉넉했습니다. 나중에 돌팔이 의사로 유명해졌지요. 못된 아이는 심심하면 동네 아이들을 때리고는 했는데, 거기에 제 친구가 걸려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중간에 끼어들어 말렸습니다.
“야, 사람을 치면 되나? 함부로 치지 마.”“너는 뭐야, 이 자식아.”“이 아이는 내 친구야.”
그랬더니 그 못된 아이가 저를 한 대 때렸습니다. 불이 번쩍거렸습니다. 성경에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했는데 (마 5:39 참조),한 대 더 맞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습니다. 눈이 빠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하신 말씀이 떠올라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힘도 없으면서 그 못된 아이한테 달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형은 권투 선수였고 그 아이는 형에게 배웠기 때문에 주먹질을 아주 잘 했습니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의 사전을 훔쳐다가 헌 책방에 팔고는 했는데, 사전을 빼앗긴 아이들은 오히려 얻어맞을까봐 말도 못했습니다. 그런 아이한테 한 대 맞고 그렇게 싸움이 끝났는데,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그 무렵 우리나라에 태권도의 전신이 되는 운동이 들어왔습니다. 집에서는 운동하는 것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새벽마다 몰래 담을 넘어서 나가 그 운동을 했습니다. 하루는 너무 일찍 가서 문을 열지 않았을 것 같아 인도에 앉아 졸다가 5분을 늦었는데, 막대기로 엉덩이를 열여덟 대나 맞고, 운동을 집어 치우라고 꾸중을 들었습니다. 이름을 지워 버린다며 얼마나 꾸중을 하던지, 악착같이 빌고 그대로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께 운동한다는 사실을 들켰습니다. 새벽마다 담을 넘어서 운동하러 이십 리 넘는 길을 가다 보면, 가는 동안 성경을 들고 새벽 기도 가시는 교회 집사님, 장로님과 마주칩니다. 그 분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천당 길을 가는데 나는 지옥 길로 가는가.’ 하고 생각하고는 했는데, 결국 아버지께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왜 그런 운동을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성경 말씀에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는데, 친구를 말려 주다가 얻어맞으니까 너무 아팠습니다. 왼편 마저 대려니 깨질까봐 안 되겠습니다. 제가 운동을 하는 것은 사람을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방위로만, 그리고 내가 남을 이길 수 있고 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참을 수 있으면 그것이 사랑이고 의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용납해 주십시오. 집안과 부모님의 명예, 그 어느 것도 손상시키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더럽히지 않겠습니다. 깨끗하게 살겠습니다. 아버지도 옛날 무사들의 정신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어릴 때 아버지께서 해 주신 이야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느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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