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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 바울의 성도 섬기는 일

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11월 04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로마서 15:22-24)
사도 바울의 원
로마서 15장 22절부터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로마서 15:22-33)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자기 자신의 판단만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성경의 기록자, 곧 이 말을 한 사람의 의도나 생각을 신중히 고민해 보면서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은 아주 단순한 이야기 같습니다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생활 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이 말씀을 한 번씩 비교해 보고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이 말씀에는 어떤 원(願)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어디 좋은 곳에 가고 싶다, 여행을 하고 싶다, 무엇을 보고 싶다 하는 것들이 바로 원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5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원은 우리 일반 사람들의 원과는 다릅니다. 바울의 원에는 고귀한 목적이 있었고 이유가 있었습니다. 또 바울의 여행은 세상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될 여행입니다. 아주 고생스러운 길이었지만 사도 바울은 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선택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곳, 즉 이 편지를 받을 로마에 한 번 가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로마서 15:22)
이것은 로마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여러 번 막혔다고 한 것은 방해를 많이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몇 번이나 죽을 뻔 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 때문에 로마에 가는 것이 여러 번 막혔습니다. 갈 시간을 약속해 놓았는데 누가 중간에서 내 시간을 빼앗아 못 가게 된 그런 식의 일이 아닙니다.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방해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로마서 15:23)
사도 바울이 전도하던 곳은 마게도냐 쪽입니다. 육로로는 로마에서 상당히 가깝습니다. 그런데 서바나는 서쪽 끝에 있는, 지금의 스페인입니다. 서바나는 바울이 있던 곳에서 로마까지의 거리만큼, 로마에서 더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해 전부터 그곳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스페인에 가서 전도했다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언제 한 번은 갔지 않겠느냐 하는 추측을 합니다. 그 먼 스페인까지 가야 하는데, 그때 로마도 한 번 들러야겠다는 마음을 사도 바울은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하러 다니는 동안에도 천막을 깁는 일을 했습니다. 요즘은 건물들이나 가옥들도 많이 있기에 천막은 여행을 하거나 등산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합니다만, 그 당시에 천막은 목동들이나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 먼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잠시 머무는 거처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천막을 깁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자기 쓸 것도 벌고 남을 돕는 일에도 쓴다고 했습니다.
당시 어떤 일로 로마에서 축출당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겨났습니다. 로마 정부가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을 쫓아낼 때,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인 사람들도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로마에서 쫓겨난 사람들 중에 한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아굴라라는 사람이고 부인은 브리스길라라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언제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고, 부인을 먼저 앞세워 일컬었습니다. 그 부부가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업을 하며 지냈습니다. 직업이 같기 때문에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부터 로마에서 교육받았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재치 있고 복음에 대해서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과 함께 일하면서 그에게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소식을 많이 전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사도행전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사도행전 18:1-3)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본도’는 지방 이름입니다. 그가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에서 왔다고 했는데, 이달리야는 이탈리아입니다. 로마가 있는 나라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가니 업이 같으므로 함께 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에 가고 싶다, 로마에 가 보아야 되겠다는 바울의 원은 아마이때부터 생겨났을 것입니다.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런 마음이 한 번씩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복음을 깨달았든지 성도들이 모이는 어떤 곳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계속 일어난다는 이야기나 누구의 가족 중에 누가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언가 가슴 뛰는 것이 있습니다. ‘나도 한번 그곳에 가 보았으면.’ 하는 충동을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충분히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에서 어떻게 지냈다는 간증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도 한번 가 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부터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사도행전 19:21-22)
“이 일이 다 된 후에”, 복음을 한참 전한 후에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거기 갔다가”, 즉 예루살렘에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처럼 로마에 가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의 생애가 결정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갈 계획이 있었는데, 거기 가면 자기에게 죽음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예루살렘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렀다가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그를 이끌어 가신다면 로마에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바울은 하고 있었습니다.
성도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로마서 15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가려고 할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로마서 15:22-26)
헌금하는 일과 헌금한 돈을 옮기는 일을 해야 했는데, 그의 앞에는 엄청난 고통과 고난이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러야 한다고 했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서바나로 가야 되는데 그 중간에 로마에도 들르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곳에 왜 가야 합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지냈던 소아시아 지역에는 이제 복음을 다 전했고 일할 곳이 없었기때문입니다. 바울은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행 20:31, 34-35) 라는 말도 했습니다.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25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 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간다는 이 말씀과 성경을 모르고 행동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올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성도를 위한 일이라는 핑계를 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돕는다고 할 때, 돕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며, 도움을 받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하는 이 말을 한 번쯤 살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전도하는 설교자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의무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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