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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10월 21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
‘저희’, ‘너희’, 그리고 ‘우리’
로마서 15장 1절부터 읽겠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13절)
로마서 15장 내용은 14장과 이어집니다. 14장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1절 는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15장은 “우리 강한 자가” 1절 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우리 강한 자’와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져진 사람들인데,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약한 성도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그때 교훈의 말씀을 주신 후에 이런 말씀을 또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같은 성도들이기는 하지만 ‘너희’, ‘저희’보다 한 차원 높여 놓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라고 되어 있는 몇 구절이 더 나오는데 소개를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로마서 14:7)
여기에서 ‘우리’라는 말은, 14장 1절에서처럼 같은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라고 ‘너희’라고 지칭한, 즉 서로 비판을 주고 받는 부류에 속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꼭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따로 뽑아 세운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으로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말씀을 가까이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위치가 바뀌어 있는 이들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습니다. 호들갑을 떨지 않고 속으로 삼킵니다. 성경에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 2:51) 하신 대로, 성경의 말씀을 깨달았어도 깨달은 것을 떠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 마음에 불붙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다면, 후에 자기 삶의 간증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로마서 14:7-8)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산다든지, 자기 욕심껏 산다든지, 자기 주장만 내세우며 사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14장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한 말씀에서 ‘우리가 다’는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모두 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10절 말씀은 육신적인 사람을 교훈하는 말씀으로, 육신적인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면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서로 비판하고 헐뜯는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 12절에는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나 ‘저희’가 아니라 ‘우리 각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사람들로서의 자세를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로마서 14:13)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맞지 않게 되었을 때, 자기 감정을 섞어 서로 비판하게 되었을 때, 이 로마서 14장에서 설명되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서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부탁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참으로 성도들을 이해하고 서로 용납하고 덕을 세우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로마서 14:19)
여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사함 받았다 하면서도 육신에 빠져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라도 다른 성도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다 보면 하나님 부탁의 말씀을 받고 자기 자신을 고치게 됩니다. 그렇게 달라졌을 때 이 말씀이 이해될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우리’는 먼저 말한 ‘너희’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14장 1절의 ‘너희’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야 되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19절의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는 말씀에서 이 ‘우리’는 거듭난 후 이제 하나님의 일에 직접 나설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마음의 각오가 된 사람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 복음을 안 후 마음에 있는 것을 한 번 더 재정립하기도 전에 말만 너무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한 말도 감당치 못하고 나중에는 쓰러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안 이후로 성경 한 마디라도 더 읽어나가고 더 깨달아 갈 때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 2:51) 하신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도 어떤 굉장한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깨달았을 때 마음에 간직하다가, 그것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가진다면 생활의 변화와 함께 자기 간증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혼자 다 깨달은 것같이 표현한다면, 다른 성도들이 깨닫도록 할 말씀이 없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혼자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살면서 교제를 이어갈 때, 우리는 그 교제를 통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많이 배우게 됩니다.
“우리 강한 자”
로마서 15장 1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강한 자”라고 했는데, 이 속에 약한 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우리 강한 자”는 말씀으로 참으로 연합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말씀으로 인해 하나가 된 사람들, 성경 말씀으로 모두 마음이 같아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라는 말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내가 강하다’라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삶을 살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절망을 겪을 때도 있고 슬픔이 올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성도들의 모임에 갔다가 교제를 갖고 찬송을 하다 보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외롭고 어려웠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걱정이 있을 때, 은연중에 어떤 성도가 부르는 찬송가를 듣고 그 가사가 ‘나를 두고 한 말 같구나.’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도들과 교제를 하다 보면 다른 이들의 표정도 비슷해집니다. 옛날 일입니다. 원래 성찬식은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됩니다. 사람들은 상당히 경건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성찬식에 임합니다. 그런데 한 자매가 성찬식 중에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찬송가 190장) 하고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던 순간에 그 찬송가가 나오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 불렀습니다. 엄숙한 분위기는 사라졌습니다. “날 정케 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없네” 하며 찬송이 죽 흘러갔는데, 성찬식이 끝났을 때 예상치도 못하게 어떤 사람이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사람이 그 찬송가 가사를 듣는 중에 ‘아, 이 예수님이 그 피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구나. 내 죄를 씻어 주셨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30년쯤 된 일인데, 그런 간증을 전에 들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생활하다 보면 자신의 문제에 빠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마음을 안고도 교제에 참여하여 찬송가를 부르거나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다 보면, 한 순간이나마 마음이 같아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후에 조금씩의 차이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똑같아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찬송가 278장) 하고 찬송가를 부를 때, 그냥 부르기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찬송을 하면서 그동안 다하지 못했던 의무에 대해서 새롭게 다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 지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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