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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사는 것

말리 홀트 | 일산
저희 가족은 원래 형제회(브레드런 처치)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인도자와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저희 할아버지 대에 온 가족이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해서 사우스다코타에 있는 땅을 나눠 받아 농사를 지으셨는데, 땅을 조금씩 늘려가서 나중에는 매우 크게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오리건 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희 형제는 네 명이었습니다. 위로 오빠 한 명과 언니 한 명이 있고, 제가 셋째이고, 밑으로 동생이 있었습니다. 오리건 주로 이사한 후 두 명의 여동생이 더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오리건 주에서 기후가 제일 좋은 곳을 찾아 정착하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을 포함한 온 가족이 함께 오리건 주로 이주했고, 한 달마다 온 가족이 모여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고모네 집, 우리 집, 할머니네 집을 서로 돌아가며 모였고, 성경 공부는 할아버지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우리 형제들에게 그 내용을 설명해 주셨고, 주일날 아침에는 아버지께서 성경을 한 장 읽으시고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할 때마다 오후에는 항상 성만찬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2, 3살 정도였지만 기억이 납니다.
오리건 주에는 나무가 많았는데, 1937년 경 아버지께서는 제재소를 차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정직하게 사업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과부가 소유한 산의 나무를 벌목한 후에 얼마의 돈을 주겠다고 계약을 하셨는데 나무를 다 벌목한 후에 보니 그 동안 나무 값이 많이 올라간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에게 나무 값을 더 치러 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에게 무척 고마워했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이 일을 잊지 못해 하셨습니다. 몇 년 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그 후에는 아버지께서 가족 모임을 맡아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서 기쁜 마음은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의무적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성경 공부는 그저 성경의 내용을 공부할 뿐 그 안에 복음이 들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은 아주 잘 되어 큰 돈을 버셨습니다. 큰 집을 짓고 요트를 사서 알래스카에도 다녀오는 등,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것들을 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1950년, 당시 45세였던 아버지는 등산을 하시다가 심장마비가 일어나 쓰러지셨습니다. 죽을 뻔한 그 상황에서 아버지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만 생각하고 잘 살려고 사업만 열심히 했습니다. 만약 제가 몇 년 만 더 살 수 있다면 주님 뜻 안에서 살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하셨답니다.
아버지의 몸은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성경책을 많이 읽으셨고 반성도 많이 하며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지 기도도 많이 하셨답니다. 당시 딕욕이라는 분이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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