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오리건 주에서 기후가 제일 좋은 곳을 찾아 정착하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을 포함한 온 가족이 함께 오리건 주로 이주했고, 한 달마다 온 가족이 모여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고모네 집, 우리 집, 할머니네 집을 서로 돌아가며 모였고, 성경 공부는 할아버지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우리 형제들에게 그 내용을 설명해 주셨고, 주일날 아침에는 아버지께서 성경을 한 장 읽으시고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할 때마다 오후에는 항상 성만찬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2, 3살 정도였지만 기억이 납니다.
오리건 주에는 나무가 많았는데, 1937년 경 아버지께서는 제재소를 차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정직하게 사업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과부가 소유한 산의 나무를 벌목한 후에 얼마의 돈을 주겠다고 계약을 하셨는데 나무를 다 벌목한 후에 보니 그 동안 나무 값이 많이 올라간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에게 나무 값을 더 치러 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에게 무척 고마워했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이 일을 잊지 못해 하셨습니다. 몇 년 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그 후에는 아버지께서 가족 모임을 맡아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에게서 기쁜 마음은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의무적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성경 공부는 그저 성경의 내용을 공부할 뿐 그 안에 복음이 들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은 아주 잘 되어 큰 돈을 버셨습니다. 큰 집을 짓고 요트를 사서 알래스카에도 다녀오는 등,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것들을 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1950년, 당시 45세였던 아버지는 등산을 하시다가 심장마비가 일어나 쓰러지셨습니다. 죽을 뻔한 그 상황에서 아버지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만 생각하고 잘 살려고 사업만 열심히 했습니다. 만약 제가 몇 년 만 더 살 수 있다면 주님 뜻 안에서 살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하셨답니다.
아버지의 몸은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성경책을 많이 읽으셨고 반성도 많이 하며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지 기도도 많이 하셨답니다. 당시 딕욕이라는 분이 구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