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경을 종결짓는 요한계시록에 가서 악독하게 사는 사람은 악독하게 살라고 부탁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성경에 선하게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 남에게 좋은 일 하라 하는 말씀만 있는 줄 알고 있는데, 이 말씀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거룩하게 하라고 하고, 불의한 자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하고, 악한 자는 그대로 악하게 하라고 합니다.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을 좇아 살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성경 처음의 에덴동산에서도 사람에게 주어졌고, 성경 제일 끝 편 마지막 장에도 인생에게 이렇게 권해 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이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아담이 먹고 사람들이 태어났고, 우리는 그 후손들이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선악과를 먹기 전에 사람의 원 조상인 아담이 생명 과실을 먹었다면 문제는 다릅니다. 먹어도 좋은 생명과는 먹지 않고, 먹지 말라고 명한 선악과를 먹은 것이 화근이 되어 우리 인류는 죄 속으로 빠져 버렸습니다. 창세기 2장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9절) 고 기록되어 있고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6-17절) 고 기록되어 있으며, 계시록 끝장에 가서는 생명 과실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계 22장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것을 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기에서 성경의 순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의지,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쟁취하고 살다가 마치느냐, 무엇하러 태어났느냐?
몇 년 전에 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이탈리아 사람인데 저는 어릴 때 그분이 출연한 영화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안소니 퀸이라는 사람하고 같이 나온 ‘길’이라는 영화인데 초등학교 때 본 것이라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주제곡은 생각이 납니다.
아 젤소미나 애달프구나
이 노래를 애틋하게 불렀던 그 어리디 어렸던 소녀가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되어 늙어 죽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세상을 한 번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떤 목표를 향해 어떤 길을 걸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인생길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나 글이 많이 발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살다가 가는 그 길, 향방 없이 따라가는 그 길에 우리는 과연 만족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쩌다 하게 되는 여행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휴가를 즐기고, 어떤 좋은 곳으로 여행을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여행을 하고 난 후에는 여행에 관한 후일담이 자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도 여행의 한 노정에 놓여있다고 하겠습니다. 과연 그것이 어떤 종류의 여행인가. 이 여행은 먼저 가고 늦게 가는 것의 차이일 뿐, 한 번은 마지막을 맞게 되는 특별한 여행입니다. 인간이면 어쩔 수 없이 치르게 되는 피할 수 없는 한 몫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연세 많은 분을 뵈면 ‘오래 사셔야 될 텐데요.’ 라고 동정 어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암에 걸린 사람이 회복되기를 바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를 아끼지 않던 한 젊은이가 그 사람보다 먼저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언제 어디에서 삶을 중단하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는 살 날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줄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서서 사람들에게 가고 있는 목적지를 물었다고 합시다. 대답이 다 각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어딜 향해 가는지 나 자신도 모르오’ 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 군상들을 보면 어디론가 가고 있기는 한데 무엇을 향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목적 의식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단지 죽음이라는 절벽을 향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혹 종교인들에게 물어보면 막연하게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갈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불교인들은 극락에 갈 것을 희망하고, 천주교 교인들은 연옥을 거쳐서 좋은 곳으로 간다고 하는 등 대답이 다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성경에는 답이 분명히 있습니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의 말과는 달리 지옥이 분명히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답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사람들에게 지옥이 있다고 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옥으로 가야 된다는 저주의 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또한 그 저주스러운 지옥이란 곳에서 구출될 수 있는, 구원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조건에 대해 거듭 거듭 간절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읽은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하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성경은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좀 이상한 표현 같지만 마음대로 자기 자유 의지대로 살든가, 아니면 거룩하게 살든가 하라는 부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펼쳐 놓은 길이 있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자신들이 어느 길에 서느냐가 중요합니다.
알아야 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혹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에 태어나지 않고 더 강한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더 행복했을 텐데’ 하는 생각 말입니다. 6.25가 일어났을 때 저는 몹시 아파서 ‘왜 내가 이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전쟁을 겪게 되는가? 몸도 아픈데 나는 왜? 밖에서는 폭탄 터지는 소리와 총소리밖에 안 들리는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났는가?’ 라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 이 성경을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에는 외형적인 행복의 조건 같은 것은 무의미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내가 어느 나라 백성이든, 내 삶의 여건이 어떠하든, ‘아, 나는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나라는 인생의 껍질 속에 내가 존재하다가 참으로 알아야 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이 안도감. 이것을 몰랐더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아찔함이 있습니다. 비참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확실한 것을 쟁취해서 살아가게 된 이 자신감은 바로 성경이 약속해 주신 것이 이루어진 증거입니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 26:24) 하신 이 말은 가룟 유다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지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내가 흑인종으로 태어났든 황인종으로 태어났든 백인종으로 태어났든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고귀한 영혼이 있는 인간들입니다. 우리 인간 속에 고귀한 영혼이 없다면 동물과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동물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돈을 벌 능력을 갖게 되면 자신의 몸을 단장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날씨의 심한 변덕에 따라 옷을 바꿔 입어야 하는 사람에 비해 밍크란 놈은 어떻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털옷 한 벌 입고 나오면 가을 겨울에는 더 두툼하게, 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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