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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9월 9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로마서 12:1-9)   로마서 12장 내용은 우리 마음을 새로이 가다듬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2절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일생에 한 번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마음이 다른 데로, 세상으로 흘러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에게 한 말이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고 참으로 새로 거듭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그렇다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세속에 젖어 있는 우리 마음을 돌이켜 보라고 부탁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2절의 앞부분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언가 피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 세대가 어떠한지 보이지 않고, 또 어떠한지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 세대에 속해 빠져들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이 세대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맑은 강물에 사는 새끼 물고기들에게 엄마 물고기가 주의를 줍니다.“얘들아, 저 아랫동네에는 내려가지 말거라.”새끼 물고기들은 이렇게 물어봅니다.“왜? 엄마는 그곳에 갔다 왔으면서 왜 우리는 못 가게 해?”“엄마가 너희처럼 어렸을 때는 그쪽 동네의 물이 맑고 좋았기 때문에 거기까지 내려가도 괜찮았어.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단다. 그 근처에 목장도 생기고 공장들도 많이 생겨서 폐수가 들어오기 때문에 너희가 거기까지 내려가면 숨을 못 쉬어서 죽게 돼.”그러나 어미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새끼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물이 얼마나 탁해졌는지 공해가 얼마나 심해졌는지 잘 모릅니다.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젖어 살다 보면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유혹해 가고 있는지 모른 채 무방비 상태에 있게 되고 그러다 성경이 요구하는 삶이나 성경이 부탁하는 교훈들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과거의 습성대로 세상 재미가 자기 몸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습성대로 사는 것이 마냥 좋은 줄만 압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술이나 담배를 좋아했다고 합시다. 복음을 안 이후에 누군가가 “그것 계속 하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하고 충고하면 성경에 담배나 술이 금지되어 있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그것을 계속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건강이 나빠지거나 음주 운전으로 사고가 나면 은연중에 ‘하나님이 나에게 경고하시는가보다.’ 하는 경각심을 가집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또 옛날이 그리워져서 그쪽으로 흘러갑니다. 세상 것들과 조금씩 친해지는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좋아 보입니다. 우리의 눈은 세상의 것을 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누군가 장님이 된 나이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당신은 세상의 좋은 경치라든가 재미있는 것들을 한 번 보고 싶은 소망이 없습니까?”그때 그 장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죄악 많은 이 세상의 것들, 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내가 눈 뜰 때는 주님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저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 짧은 안목으로는 세상이 좋은 것 같고 또 우리 마음은 세상에 많이 끌리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시간이 굉장히 아까울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병에 걸리거나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면 주님 앞에 시간을 어떻게 쓰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어려울 때는 그렇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어렵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힘들지 않을 때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로마서 12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어떤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자비하심을 총 동원하여 성도들에게 권한다고 하면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읽으면, 구약 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지만 지금은 어떻게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몸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일까요?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사들 중에 입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돌아올 때 누구든지 자기 집 문에서 제일 먼저 나와 환영하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기로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제일 먼저 나와 환영했습니다. 입다가 돌아왔을 때 딸이 기뻐하고 춤추면서 맞이했기 때문에, 입다는 서원대로 그 딸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때 입다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딸은 처녀로 죽었습니다. (삿 11장 참조) 입다는 하나님 앞에 한 번 결정한 일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역사의 한 부분을 생각해 볼 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라고 했는데, 이 ‘내가’는 사도 바울 자신을 말합니다. “형제들”은 모임을 대표하는 남성들인데, 로마 교회의 남성들을 대표하여 ‘형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고 여기 자매들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들과 자매들 모두를 대표해서 ‘형제들아’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여러 사람에게 부탁한 말씀입니다.“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너희 몸’은 복수형입니다. 우리는 각각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말씀하신 ‘너희 몸’은 단순히 우리 육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후 세상에서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지닌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의 몸을 뜻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 말씀은‘너’라는 한 사람을 꼭 집어서 한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라고 할 때는 어디까지나 여러 사람, 연합된 사람, 합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는 합당한 예배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형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와 구약 성경에 나타난 모든 제사 방법 등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으레 경건하게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설교를 듣고 성경을 보는 것을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진정한 ‘영적 예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갖추는 경건의 모습, 설교 듣는 자세나 기도하는 자세가 아름다워 보이고 참신해 보이더라도 그런 모습은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과는 절대적으로 무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성경은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라는 부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일찍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요 4:23)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느 정해진 시간 안에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습 자체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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