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9월 2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로마서 11:25)
이 비밀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로마서 11:25-36)
25절부터는 내용이 아주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좀 더 차분한 마음으로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될 이 진리를 너무들 모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가끔 ‘나는 어떻게 이 시대에 태어나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모르고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생각도 못했던 일인데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행복의 기준이 어디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에 굉장한 비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준다고 한들 그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그것에 대한 감사를 느끼겠습니까? 사고로 뇌를 다치면 가족도 친구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게 모든 것이 다 있다 할지라도 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처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우리는 어려서부터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들어왔고, 무엇을 알려고 무척 노력도 해왔습니다. 죽어 없어진 사람들의 이름도 많이 외웠고, 무엇이 진리인지 찾아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는데 어떤 것을 아는 것이 힘인지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롬 11:25) 하는 말씀을 보고, ‘그렇다. 내가 몰라서야 되겠는가. 만약 내가 부모를 보고 부모인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도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언젠가 읽은 성경 속에 “너는 아느냐” (잠 30:4) 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너는 아느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그 창조자의 이름을 아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또 그 아들의 이름을 너는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으레 ‘안다’고만 생각했는데 성경을 읽고 또 가까이 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아는 것은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어떤 큰 산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산의 모양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사진에 찍힌 산의 모습, 그림 그리는 사람이 동양화 기법으로 그려놓은 산의 모양, 영화 속에 보이는 산의 모양 등 다 다릅니다. 화면에서는 산이 앞으로 튀어나와 보이기도 하고 계곡도 제대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산을 입구에서 보면 멀리서 볼 때와 참 다릅니다. 산에 걸어 들어가면 가는 길이나 계곡, 절벽들이 모두 신기하고 새롭습니다. 또 산에는 좋은 면도 있지만 위험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아는 것보다 더 심오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적당하게 아는 것은 우리를 삭막하게 만듭니다.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알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 1:10)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골 3:16)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기만 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약 1:22 참조) 우리에게는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써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게으르지 않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성경이 얼마나 가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지 잘 모르고 대하게 됩니다. 물론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떤 책보다 과자 하나가 더 낫고, 지식을 전달하는 책보다 빵 한 조각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충분히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로 양식을 삼으려고 애쓰게 됩니다. 물론 우리 육체의 양식은 따로 있습니다. 육체가 배부르면 어느 정도는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영혼의 갈증은 육체의 욕구와 아주 다릅니다. 영혼이 궁핍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채웁니까?제가 성경을 통해서 알아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책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책을 읽느라 보낸 그 많은 시간들만큼 성경을 더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 66권의 몇 백배 되는 책들을 읽어 보았습니다만, 성경만한 책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 그 많은 책들과 성경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성경을 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책들 속에는 좋은 글도 많지만, 그 글들은 우리에게 의문만 제시할 뿐 답을 내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많은 의문이 있고, 그에 대한 답을 영혼 깊숙이 내려줍니다. 그것은 삶의 희열을 가져다줍니다. 결코 낙망이나 괴로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몰랐더라면, 누군가 제게 무엇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아마 아는 것을 이것저것 대려고 애를 썼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제일 좋은 것이 무어냐고 물으면, 망설임없이 자기 어머니라고 답할 것입니다. 어머니를 아는 것이 그 아이에게 자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을 아는 것이 자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굉장히 가치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앞서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하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은, 무언가를 알라는 말입니다. 어떤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을 몰라서는 안 된다,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하나님을 향해 문을 닫고 있다는 말입니다.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고 했는데, 어디서 어떻게 들어온다는 말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25절과 12절을 연결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로마서 11:12)
“저희의 넘어짐”은 유대인의 실패를 말합니다. 유대인이 실패한 것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실패로 유대인 아닌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진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버림받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그냥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때 저희는 어떻게 되겠느냐, 그 축복이 굉장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25절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로마서 11:25)
12절에서 유대인이 돌아설 때 얼마나 많은 축복이 그들에게 주어지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여 이방인에게 주어진 기회는 어떤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버림받게 되었고, 타민족들에게 잡혀갔고 나라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 역사는 교회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물론 이 교회에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도,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 아닌 이방인도 속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하나님의 뜻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림으로써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는 말씀을 달리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숫자를 계산해 어떤 사람은 들어오고 어떤 사람은 못 들어오게 예정했다는 식으로 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 잃어졌던 이방인들, 즉 미리 택하신 유대인 아닌 이방인에게 기회를 주시고 부르시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약속의 기간에 채워지는 수를 말한 것입니다. ‘충만한 수’라고 한 것은 충만한 어떤 숫자를 말하는 것이지, 누구누구가 정해져 있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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