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창세기 전체 흐름을 보면 창조의 원칙에 의해서 하나하나 새로운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과 바다를 만들고 궁창을 만드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는 창세기 1장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장부터는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씩 실행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천지는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에 완성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다음부터도 새로운 일들이 하나씩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낙원의 시작이 나타납니다. 이 에덴 동산은 훗날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서 회복시키실 천년왕국의 그림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 후에 남자에게서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드시는 과정이 자세하게 나타납니다.
또 어떻게 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서 인간이 어떻게 되어간다는 과정도 설명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한 이후에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옷에는 인간의 노력이 들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한 인간이 무화과 잎을 따서 치마를 해 입은 것은 인간 자신의 힘입니다. 그러나 짐승이 죽어서 피를 흘리고 그 가죽이 벗겨져서 인간에게 덮어씌워진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입니다. 거기에 벌써 복음의 그림자가 비취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에덴에서 쫓겨난 인생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두 가지 방법이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짐승의 죽음이라는 희생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땀 흘려 농사지은 결과인 땅의 소산물로 드린 가인의 제사에는 인간의 노력만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까? 가인은 자기가 땀을 흘려 지은 농산물을 바친 데 비해, 아벨은 무언가 자기 부모에게 들은 것을 따라 자기 노력이 아닌, 짐승을 죽여 피를 흘려 그 희생을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제사의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 자손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아들로 가인과 아벨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아담의 대를 이을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4장 25절에 보면, 아담의 대를 이을 아들 셋이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후 아담은 930세까지 살면서 많은 자손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이 다시 나타납니다. 5장 24절에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셔서 그가 세상에 있지 않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 온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훗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시려는 표본으로 에녹을 데려가셨습니다.
그 후 인류 전체가 대심판을 받지 않으면 안될 만큼 인류 전체의 죄가 세상에 드러나는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때에 인간 세상에 대홍수를 내리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방주를 만드는 방법을 노아에게 가르쳐 주셨고, 노아는 그 말씀을 따라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아가 배 만드는 것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 못하는 짐승들은 배에 타 구출되었습니다.
아마 훗날에도 이와 같은 때가 올 것입니다. 세상 지식과 학문의 수준이 높아가고 인간의 지혜 또한 고도로 발달하는 가운데 어느 날인가 하나님께서 낙원을 회복하실 때 끝까지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은 불행해지겠지만, 많은 동물들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노아 때 대홍수가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또 슬픈 사실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 11:4) 하고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 쌓는 것을 중지시키셨습니다. 그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흩어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훗날 언어가 모든 민족에게 이해되고 확실히 설명될 수 있는 날을 내다보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날입니다. 그 날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제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을 했을 때,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은 각각 자신의 언어로 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언어가 하나로 통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러시아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복음을 확실히 깨달은 사람들의 간증을 번역해 보면 내용이 똑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깨달았는지 그 내용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 일어났던 일과 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방법이 있었는가 하면, 창세기에는 또 다른 구원의 방법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어느 땅으로 가라고 하신 일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이삭에게 나타나시고, 야곱에게 나타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복이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창세기의 설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사람의 대열 옆에 저주의 길이 놓여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는 저주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서도 이스마엘이 따로 떨어져 나가고, 에서가 따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입히신 가죽옷, 아벨의 제사, 또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등 여러 모습으로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의 끝부분에 가서 요셉을 통해서 먼 훗날 인류가 구원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세기 15:13-16)
“이방에서 객이 되어”, 이방이 바로 이집트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가서 살면서 종 생활을 하고 괴로움을 당하는데, 그들을 괴롭게 한 이집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지는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집트인들에게 벌을 내리셨고,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큰 재물과 함께 약속된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아브라함부터 이어진 축복의 역사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자손이 아직 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도 늙고, 자기 부인도 늙었는데, 하나님께서 자꾸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시니 속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래도록 아들이 없자 본부인 사라가 데리고 있는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약속의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훗날 아브라함을 떠나, 영구히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역사를 잇게 됩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세기 17:9-10)
이 할례에 대한 언약은 훗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람들의 영혼에 진짜 할례가 이루어질 것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사라에게 아들을 주셨고, 사라는 90세의 나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은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렵게 얻은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1-2)
나무로 단을 쌓아 놓고 아들을 불사르라는 말입니다. 열 명의 자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들 하나를 바치기 어려울 텐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뿐인 아들을 바칠 것을 명하셨습니다. 약속도 주실 뿐 아니라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그만한 시련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세기 22:3-4)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는 이 일은 오랜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실 것에 대한 그림자로서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하나님께 바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인간을 위해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이삭은 죽을 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신해서 죽을 양을 미리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먼저 떠보시고 이삭을 살리신 것입니다. 이삭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이었습니다. 맏아들 에서는 다른 민족의 여인과 결혼해 아브라함의 가정을 떠났고, 작은 아들 야곱이 아버지의 전통을 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마 1:2) 하는 말씀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후손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후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 삼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창세기 12장부터 아주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지상에 가정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대단한 모델이 생겼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냄새가 그대로 나타나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일들, 나쁜 일과 좋은 일과 희로애락이 다 나타납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다 겪는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점점 굳어져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창세기 30:22-24)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요셉과 그의 동생,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배다른 형들이 열 명이나 있었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을 때, 그 위의 열 아들은 요셉을 질투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시는 동생 요셉을 미워한 나머지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복형제들이 한 동생을 죽이는 데 함께 가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맏형이 죽이는 것을 말리자 아홉 명이 요셉을 죽이는 대신에 이집트에 장사하러 다니는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형들이 가져온 피 묻은 요셉의 옷을 보고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집트 왕의 시위대장 집으로 팔려간 요셉은 종으로 살면서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요셉은 야곱의 가족 전부를 이집트로 옮겨 오게 합니다.
참 묘한 것은, 요셉이 한 인간으로서 비참한 고난을 겪고 있을 때에도 그 뒷면에서 하나님의 힘이 그를 보호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확실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그 꿈을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형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애 이면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어떤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참을 수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된 말 전함으로 내 할 본분 삼았도다 (찬송가 209장)
주님의 은혜를 확실히 알았을 때 정말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힘이 우리 속에 있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