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라’는 말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것만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 떠난다면 누가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지키겠습니까? 그것은 ‘그들과 마음을 같이하지 말라,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 그들의 모임에 동참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보아야 옳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에는 그런 나쁜 요소가 있는 사람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지만, 요한일서에서는 나간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라고, 나갔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나갔다는 표현으로 보면 그들은 교제에서 아예 분리되어 떠나 버린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한일서 2:19)
저희가 나갔다. 저희가 나간 것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만약 함께 거하였다면 저희가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교회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인한 교제를 알고, 간증이 서로 같은 사람들끼리 교제를 갖다가 그 가운데에서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디에 가 있어도 똑같습니다. 한 교제 안에 있든, 지구 반대편에 가 있든, 달에 가 있든 다 같은 형제자매입니다. 여기서는 교제의 장소를 옮기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이 달라진 사람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한 교제 안, 한 성령 안에서 한 분 하나님,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실이 확실하다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하신 말씀처럼 그 교제에서 분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라”는 말씀은 저희가 떠난 것은 우리와 무언가가 달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이 달라져 행동으로 자리를 옮겨, 육신이 교제에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 로마서에 있는 말씀은 아직까지는 로마 교회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로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한 것입니다. 그들 중에 엉뚱한 일들이 일어날까봐 사도 바울이 서신을 통해 경고한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1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그리스도인들의 교제 속에 어떤 분열 작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 내용이 편지에 기록되어 로마에 전해졌을 때의 로마 교회는 참으로 믿음이 올바른 교회였습니다. 이 로마 교회 사람들은 바울 사도의 편지를 받고 그 교훈에 상당한 감동을 받았고, 그 교훈대로 살아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초기 로마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핍박
지금 우리 시대에서 1900년 전 과거를 돌이켜 그 당시를 생각해 봅시다. 로마서가 로마에 도착했을 그때 교회와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이 로마서가 기록될 그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자리를 옮겨서는 안될, 마음이 변질되어서는 안될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로마 서신을 받았을 때의 로마 교회는 참된 믿음으로 시작된 교회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믿음은 한번 철저한 시련을 받게 됩니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역사가 흐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의 로마 교회가 로마서에 나타난 이 교회와 같은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현재 로마 교회는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 자체를 보아야 합니다. 편지를 받았을 당시에는 떠나서는 안되었지만, 그 이후 교회 2천 년 역사 속에서는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역사가 흘러갔습니다. 이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교회 역사 가운데 종교의 암흑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로마 교회에서 주장하는 믿음대로 하지 않으면 사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교회가 교권을 확립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 자신들의 신앙과 차이가 있다고 해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여 버리는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야 교황은 그 일에 대해서 유감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사과를 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교회에는 그런 권력을 휘두를 권리가 없습니다. 물론 그런 과오를 저지른 그들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천 년간 이어져 온 교회는 시대에 따라서 많이 변천해 왔습니다. 이 로마 서신을 받았을 당시의 로마 교회는 정확하게 믿고 정확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3백 년 동안 이 로마 정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임을 당한 곳을 볼 수 있고,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숨어 지내던 카타콤도 볼 수 있습니다. 카타콤은 흙을 파낸 지하 땅굴이었는데 여기 숨어서 살던 사람들은 시체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어서 흙벽을 뚫어 시체를 놓고, 그 밑에 향을 깔아 냄새가 덜 나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로마 정부에서 교회를 인정하기 전까지,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죽어갔습니다.
죽이는 방법도 묘합니다. 죄를 정할 수 없으니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만 하면 살려 주었습니다. 아주 추운 날 옷을 하나도 걸치지 못하게 하고 밖에 세워놓습니다. 한 쪽에서는 따뜻한 장소에 잔뜩 음식을 차려놓은 잔치가 열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욕을 하기만 하면 그 잔칫상에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배신한 사람들이 먹고 즐기는 동안, 한 쪽에서는 사람들이 얼어 죽어 갔습니다. 믿음을 배신한 사람들 숫자만큼의 로마군 장교들이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 얼어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순교사화(殉敎史話) 속에서 본 내용입니다.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믿음을 지켰는데, AD 313년 경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꿈에 십자가를 보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며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 로마 교회는 2천 년 가까이 교권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불태우고 그들이 사자에게 뜯어 먹히는 것을 보면서 술잔을 건네고 잔치를 했던 사람들도, 황제가 예수를 인정하니까 한꺼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숫자가 3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정확하게 회개와 구원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그때 많은 로마 사람들이 개종을 한 것은 숫자적으로는 아주 상당한 것이었고 크나큰 부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로마 교회는 서서히 썩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이 로마 서신이 로마에 도착하던 당시에 서신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참신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에 있는 교훈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때 로마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교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안되었고, 오히려 함께 교제를 가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부탁하기를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서 떠나라고 하는지 살펴봅시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로마서 16:18)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배만 섬긴다, 곧 직업적인 교인들이라는 말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먹고 사는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섬겼다는 뜻입니다. 지금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를 왜 하느냐고 물으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시험을 왜 치느냐고 물으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국가 시험에 합격하면 국가가 주는 혜택으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다른 큰 기업들도 그런 열성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시험을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등수를 매겨 상을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배를 안 섬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어야 하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무엇이든 먹어야지요. 누구든지 먹어야 살잖아요. 배를 채우지 않으면 굶어 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 ‘자기 배만 섬긴다’ 라는 것은 먹고 사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먹고 살기 위해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말을 연구하고, 설교를 연구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상당히 말 재주에 능할 수 있습니다. 아주 정중하게 사람들을 대하고, 참 겸손해 보입니다. 입에 발린 칭찬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떠받드는 일도 참 잘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이 사람들의 자세는 정중한 것이 아닙니다.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람이 왜 나쁘다고 할까? 참 겸손하고 점잖은 사람인데.’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정도로 설교자들이 위대해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무언가 이탈될 수 있는 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 읽은 로마서 16장 17절과 18절 내용에는 그냥 지나쳐 넘어가서는 안되는 문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적당하게 넘어가지 꼬치 꼬치 따질 필요가 있나? 그 사람 믿음은 그 사람 믿음이고 내 믿음은 내 믿음이고, 각자 믿는 대로 놓아두지 그런 것 따질 필요 있나?’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믿음에 있어서 틀릴 때는 여지없이 그것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아는 상태에서
로그인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볼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