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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8월 12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로마서 10:16-21)   이 내용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로마서 10장 전체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0장뿐만 아니라 로마서 전체를 함축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책에는 전체 내용을 시작하기에 앞서 대강의 내용을 설명해 놓은 머릿글이 있는데, 이 내용이 그런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말하기 위해 기록되었는지 궁금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읽으면 좋겠습니다.16절에 보시면,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면 바울이 무슨 의도로 로마서 10장을 기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로마서 10장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사도 바울에게는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었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원하는 이유가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원이 있다면 ‘하나님, 저를 이렇게 구원해 주셨으니 다른 가족들도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 하는 바람일 것입니다. 어느 집안의 부인이거나 남편이든, 아들이거나 딸이든, 그 집안의 한 사람으로서 구원받았다면 다른 가족을 위해 그런 기도를 할 것입니다. 가족이 아무도 없다면 다른 일가친척이나 친구라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이 험악한 죄악에서 저를 건져 주셨습니다. 태어난 목적도 모른 채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살았고 항상 원망만 하며 죽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렇게 어둡고 답답한 중에서 제 마음을 밝게 해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도 건져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하게 마련입니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이라도 그런 간절한 마음은 똑같습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명예가 높고 좋은 것을 가졌다 해도 이 세상은 언젠가는 끝날 것이기에, ‘하나님, 제 가족들은 잠깐 지나가는 이 세상에 맡겨진 사람일 뿐입니다. 영혼은 영원히 지속될 텐데, 제 가족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건져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똑같은 심정일 것입니다.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세상일로 바쁘고 세상 사는 것이 재미가 있다 할지라도 그에게 그 재미는 잠깐일 것입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하나님, 다른 영혼들을 건지는 일에 저를 도구로 써주십시오.’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직 용기가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당연히 나타나는 삶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0장을 읽다가 제게 무언가 더 깊이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계속해서 마태복음을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보아 온 성경인데 참 이상하게도 새롭게 보였습니다. 또 시편도 읽어 보았습니다. 시편을 읽다가 또 새롭게 보이는 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귀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4:7)   어느 부한 농부가 풍년을 맞아 추수하며 느끼는 그런 기쁨보다 주님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기쁨을 찾기 위해, 또 만족을 찾기 위해 별별 곳을 다 헤매며 기쁨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무엇이 진정한 기쁨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 첨 받은 날 참 기쁜 날이 아닌가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계에 전하노라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새찬송가 249장)   얼마나 감사했기에 이렇게 찬송을 했을까요? 얼마나 벅차기에 “이 기쁜 맘 못 이겨서”라고 했겠습니까?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어릴 때의 일입니다. 나침반이 필요했는데 나침반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한 어른이 바늘을 종이 위에  끼우더니 물 위에 띄웠습니다. 그랬더니 바늘이 움직이다가 한 쪽 방향으로 섰습니다. 그 바늘에는 분명히 축이 없었는데 움직이더니 꼭 축이 있는 것같이 멈추어 섰습니다. 그렇게 방향을 알아내는 것을 보고 참 신기하다고 느꼈습니다.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나 즐거움의 축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영혼의 닻” (히 6:19)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그러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한 번 영원한 기쁨을 주셨습니다. 죄를 사해 주셨다든지 구원해 주셨다든지,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이루어진 것은 모두 똑같습니다. 마음에 주신 기쁨입니다.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기쁨이 있는 사람은 무언가에 간절한 기대를 가져보기도 하고 원해보기도 합니다만, 바울이 가졌던 원은 보통 사람들의 원과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동족이 하나님께 잃어진 것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했고, 자기 민족이 구원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거대한 그릇을 통해 나타나는 그 간절한 소망의 표현은, 세상을 살면서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생계유지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우리들에게 한 번씩 충격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 바울이라는 거대한 그릇을 통해 나타난 로마서 10장 1절, 2절과 같은 표현을 읽을 때면, 우리는 바울의 원처럼 거대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주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하신 말씀을 어떻게든 이루어 주십시오.’ 하는 바람이 생겨납니다. 또는 ‘안 되면 왜 안 되는지 깨닫게 해 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런 양심의 충동은 성령이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고 살전 5:19 참조,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엡 4:30 참조) 사도 바울에게 그런 마음을 일으키신 성령은 우리 양심에게 소원을 일으키신 성령과 같은 분입니다. 확성기를 통해서 들리는 소리가 크고 작고의 차이뿐이지, 근본은 같습니다.사도 바울의 그 위대한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 잃어진 자기 동족이 구원받는 것이 자기의 원이라고 한, 바울이라는 큰 확성기를 통해서 퍼져나온 소리에 비해 우리의 소리는 너무나 작기만 합니다. 그러나 비록 작아도 그 소리는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없던 마음입니다. 이것은 세상 어떤 성인군자도, 어떤 위대한 사람도 갖지 못했던 마음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그 부탁이 한번씩 작용을 합니다. 한번씩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말씀을 통해 변한 우리에게 내 가족들이나 친척들, 친구들을 향한 소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나’라는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나’는 세상을 사는 동안 세월에 쓸려가고 세상 재미에 빠지고 세상에 섞여 살았을지라도 영원에서 보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하며 성도들과 교제를 가진 기간이 긴지 짧은지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생 동안 주님과 함께 산 사람에게나, 일생 동안 죄만 짓다가 십자가 옆에서 주님 앞에 ‘날 기억해 주십시오.’ 한 그 사람에게나 낙원을 허락받는 축복은 같습니다. (눅 23:39-43 참조) 단지 상의 크고 작음만 있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축복, 영원히 누릴 축복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는가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주여, 제가 복음을 안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계속 주님과 같이 일했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고, ‘주여, 제가 어떻게 하다 곁길로 갔습니다만 이제는 주님과 함께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답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아침부터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한 사람과 늦게 들어가 일한 사람의 받는 삯이 같다고 누군가 불평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것이 주인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마 20:1-16 참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을 거역하고 실컷 놀다가, ‘죽을 때 되서 주님께 잠깐 붙겠습니다.’ 한다면, 주께서 그런 사람은 먼저 거두어 가실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시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전도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 왕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가 있었지만, 나이 들어 발을 잘못 들여서 이방 출신 왕비들이 가지고 온 우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줄 만큼 형편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솔로몬이 훗날 전도서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1:2-3) 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우리는 백화점에 가서 좋은 옷이나 카메라, 혹은 자동차를 사고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좋아했던 것들도 세월을 보내고 나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지 않습니까?솔로몬은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전도서에 모두 기록했습니다. 그가 많은 젊은이들에게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 11:9) 고 표현해 놓은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저는 마음속에 ‘주님, 우리 육신은 이렇게 가는 것이군요.’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다 누려 본 사람이 ‘인생의 답은 이러하다.’고 기록한 것이 전도서인 것입니다. 위대한 왕 솔로몬이 겪었던 외로움과 괴로움, 모든 어려움은 그가 누렸던 세상 즐거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잠 14:13 참조) 우리는 솔로몬의 마지막 부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고 한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짧은 생애를 부여받고 세상에 태어나 가족도 얻었고 재산도 누리고 살지만, 죽을 때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가족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전에 나이가 많은 한 노인이 북쪽에 두고 온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쓰러졌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나 쓰러지셨다는 노인분이나 다 연세가 많지만, 그 육체 속에는 늙지 않는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 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죽어도 영은 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위대한 것이기에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겠습니까? 또 그것을 위해 세상을 살라고 부탁하셨겠습니까?“주가 내게 부탁하신 모든 역사 마친 후” (찬송가 224장) 하는 노래는 전도인에게만 주어진 노래가 아닙니다. 우리 각 사람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실히 안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이 노래가 자기 것이냐 아니냐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우리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식물들은 계절에 맞추어 꽃을 피우고, 온실에 있는 화초도 온도와 시간 등의 환경을 맞추어 주면 꽃을 피웁니다. 모든 것이 자기 나름대로 창조자를 표현합니다. 그렇듯 이 세상에 놓인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어떤 표현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주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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