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010.11>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하라

    최외란 | 부천       불안한 어린 시절저는 경북 의성의 한 시골마을에서 1남 5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저와 띠동갑인 큰 언니는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집을 갔고, 여덟 살 많은 3대 독자인 오빠와 두 살 위의 언니, 그리고 동생 둘과 함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2대 독자로 집안에서 귀하게 자라신 아버지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셨습니다. 한문과 같은 학문에는 능하셨지만 바깥 활동은 일체 하지 않으셨고, 농사일에도 전혀 소질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거나 편지를 써 주며 소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 소득도 없이 집안에만 계시는 아버지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시는 어머니 사이의 불화는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떠나 충청도 어디에선가 따로 생활하셨고 1년에 한두 번씩 집에 오셨는데, 다시 가시는 날에는 온 집안을 쭉 둘러보시고 어린 저희들에게 엄마 말씀 잘 들으라고 당부하며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떠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보았던 것이 어렸을 때 기억의 전부입니다. 철이 들면서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사춘기였던 오빠는 그런 환경을 비관하였나 봅니다. 여름날의 길고 긴 낮에는 방에 누워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있다가 밤이 되면 온갖 치장을 하고는 밖으로 돌았습니다. 오빠의 그런 생활이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지면서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서로 죽느니 사느니 하는 치열한 다툼으로 번져갔습니다.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생각으로 양잿물을 마시기도 했고 저수지에도 몇 차례나 들어가셨습니다.그런 환경에서 자란 우리에게는 그나마 학교가 유일한 피난처였습니다. 하교 시간만 되면 가슴이 쿵덕거렸고, 집이 가까워질수록 증세는 심해져 집 앞에 다다르면 저도 모르게 지붕과 담장을 확인하는 버릇(그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지붕에 옷을 올리고 담 위에 신발을 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이 생겼을 정도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게다가 염세주의적 기질이 강한 바로 위 언니까지 이상한 행동만 했습니다. 저의 생일은 공교롭게도 언니와 같은 섣달 그믐날이었는데, 언니는 생일만 되면 이 세상에 태어난 사실을 원망하면서 그릇 중에 제일 찌그러지고 낡은 양은그릇에 밥을 담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



* 온라인 쇼핑몰

글소리 PDF 웹북 펼쳐보기


* PC 버전 홈페이지 전환



Copyright (c) 2025 (주)많은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