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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자

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7월 8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16)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성경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로마서 9:14-18)   제가 성경을 아주 가까이하기 시작한 것은 22살 때부터입니다. 그 전에도 성경을 더러 읽기는 했지만 무언지 잘 몰랐고, 22살부터 가까이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4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성경을 보았는데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보아 둘 것을’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제 좁은 소견에 성경을 몇 번 읽었다고 해서 다 알아진다면, 성경이 별 가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성경은 그만큼 심오하고 깊습니다. 그렇지만 그 성경을 읽으며 나의 책임과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야 합니다. 물론 훗날 하나님 앞에 갔을 때는 성경에서 말하는 역경과 고난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조금 더 알아야 하고, 성경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여러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기억력이 좋을 때 그 말씀들을 읽고 따라 살면서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조금 더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직 건강하고 젊을 때에 성경을 더 알아야겠다는 의욕을 가지면 좋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학문들과 지식들이 있고 지식적인 사람, 가르치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 인간이 참으로 확실히 알아야 될 것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대로 가르치고 배우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공부했다는 것만 남을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어떠한 학문이라도 성경과 견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학문이 어느 한 특별 분야만 다루는 데 비해 이 위대한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기록하고서 한 말은 “하나님께서 내게 일러 가라사대”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학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목이 타서 갈증이 나면 물이 필요하고, 배가 고프면 음식이 필요하고, 몸이 아프면 약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이 시간 안에 있는 일들입니다. 자기의 한 생애 내에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것이며 불변합니다. 그러한 우리 영혼에 갈등이 일어나면 무엇으로 해결해야 합니까?세상 사람들 중에는 사람에게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 학문을 많이 연구하고 터득했을지라도 자기에게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해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영혼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기억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늙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영혼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몸 밖으로 나갔을 때 죽음이 옵니다. 이러한 영혼의 갈증은 무엇으로 메워야 하겠습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메울 수 없습니다. 병든 영혼이 허덕일 때 성경 말씀이 우리 영혼을 감싸주고 적셔주며, 마음이 괴로울 때 희열과 기쁨을 주어 달래주고 고쳐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이 육체의 현실적인 눈으로 보고는 달갑지 않게만 여깁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그렇습니다. 우선 세상 것에 바빠 자기 앞에 전개되는 것들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얼마나 큰 손해를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멀리하면 그만큼 자신에게 손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굶주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 영혼에 어떠한 덕도, 만족도 주지 않습니다. 영혼의 갈증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문명이 발달되고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즐기며 마음에 흐뭇해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무언가 우리 영혼에 채워지는 것이 있습니까? 영혼은 점점 더 갈증으로 허덕이고 있지 않습니까?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모스 8:11)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처럼 갈증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헛것으로 약속해 놓은 세상 것에 빠져서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내 부모, 형제, 또는 자녀들이 그런 것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셨습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하는 정신의 소유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책임을 느끼는가,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조건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이 앞으로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 성경이 과연 내 영혼을 바로잡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 9장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4절)   앞의 어떤 내용들을 연결하여 “그런즉” 하며 말을 시작했습니다. 앞의 내용은 어떤 내용입니까?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0절)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삭 한 사람을 통해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이 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혈통과 가계에 이어지지 못하고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에서입니다. 이 사람도 확실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삭의 정통 아들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윗대에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스마엘은 동생인 이삭과 어머니가 다릅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는 이삭의 어머니의 여종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가계를 잇지 못하고 다른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그런데 에서는 어떻습니까? 에서는 확실히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본처에게서 난 이삭의 피를 이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백성의 대열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복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셨습니다. 만세 전에 예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태어나서 한 일 중에 큰 실수가 있었는데, 바로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판 것입니다. 에서는 축복을 스스로 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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