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숙 | 대구
내 영혼이 은총 입어저는 1948년에 경상북도에서도 앞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교회에 열심이셨기에 저는 나면서부터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칠남매의 맏이였던 저는 쉽지 않은 생활 속에서 살았습니다. 일에 시달리고 동생들에게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 좋은 산천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뛰놀고 즐길 수 있는 여유는 제게 전혀 없었습니다. 교회 생활은 제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었습니다. ‘집 앞에 항상 보이는 저 산과 그 위의 하늘은 어떻게 저런 모양으로 항상 서 있을까? 나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해 분명히 배웠고 시험을 치르기도 했는데, 제가 가진 의문들과 그 성경 내용을 전혀 연관짓지 못하고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며 눈을 감고 상상 속에서 종이 위에 연필로 끝없는 동그라미를 그려대곤 했습니다. ‘이젠 이런 생각은 접고 떠올리지 말자, 너무 복잡하다.’ 하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고향을 떠나 대구로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사업을 위해 대구로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구에서의 생활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식사도 챙겨드려야 했고 학교도 다녀야 했습니다. 2년이 지나자 모든 가족이 대구로 왔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제 마음의 의문이 더 많아졌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당신이 정말 계십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며 찾았고, 여러 교회와 부흥회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분의 설교를 들어도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진학을 할 수 없다는 괴로움과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갈증으로 저는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바로 직장을 구했습니다. 직장에서는 쉬는 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유행가도 부르고 웃으며 재미있게 지냈지만, 저는 그런 곳은 피해 다녔습니다. 웃고 나면 마음은 더 허전하고 구멍이 뚫린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19살이었고 그때 저와 친했던 친구가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장티푸스로 11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는 화장되어 재 봉지에 담겼고, 친구의 부모님은 우리 아버지에게 그 봉지를 전해 주고 비통한 모습으로 떠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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