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7월 1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로마서 9:1-3)
동족을 향한 바울의 간절한 심정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또한 하나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로마서 9:1-13)
이 말씀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따라 사는 중에, 자신에게 참된 원이 하나 있는데 그 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영원한 심판의 대상이 될지라도 괜찮다는 간절한 이야기입니다. 그 원은 바로 자기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들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을 택하겠다는, 뼈에 사무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을 쓴 사도 바울이 걱정하는 자기 동족들, 일가친척이 속해 있는 자기 민족들이 그를 좋게 대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나쁘게 대하고 심지어 죽음의 지경까지 몰아가는 일이 계속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하며, 자기 동족의 구원을 바랐습니다.이것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물로 칭송 받기 위해서 그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만들어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의 양심 속에 있는 참된 희생의 정신과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9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한다.’ 그리스도 밖에서가 아닌, 즉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예수를 믿은 상태에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찬송가 455장)
아마 사도 바울이 현 시대에 우리와 함께 살았다면 이런 찬송가를 불렀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마음속에, 여러분 각자의 마음속은 어떻습니까? 다른 근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로마서 9:1)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마음에 과거의 근심과 고통들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큰 근심이 도사리고 있었을까요? ‘내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내가 차라리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과 바꾸겠다’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그의 마음의 고통입니다.우리는 어떠한가 생각해 봅시다. 주변 사람들을 아무리 많이 생각한다 해도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랑하는 가족, 일가친척, 친구들의 범위는 상당히 좁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생각의 범위는 굉장히 넓었습니다. 우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 있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겪게 되는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1-2절)
‘그치지 않는 고통’, 즉 그치지 않는 슬픔의 고통입니다. 이 사람은 처절하게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고통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각자 모두, 처음 복음을 깨달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 동생이나 오빠, 또는 누나 등 가족을 제일 먼저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령으로 인한 일반적인 근심입니다. 말하자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는 약속으로 인한 근심입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니 이제 가족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오는 근심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우리 모두가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도 바울의 양심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많이 씻긴 양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심이 맑아져 있는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예수를 믿은 이후에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보답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양심의 소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는 자기 동족의 앞잡이를 자처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고 처치하러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해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이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은혜로 깨끗이 씻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배우며 씻긴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말씀이 자기 속에서 달음질하였고, 이 말씀이 다른 영혼 속에 달음질하도록 전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전도로 인해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갈 때, 그것을 방해하고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채찍으로 맞고 돌로 맞고,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고통 당하는 중에도 성경 말씀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들의 그 험악한 모습을 보고도, 그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개인이었다면 그런 마음이 있을까요?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원수’라는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가 원수로 여기는 것은 마귀밖에 없었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 9:1), 이 사도 바울의 말은 얼마나 멋집니까? 근심과 슬픔의 대상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내게 슬픔과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불쌍해서인 것입니다. 그들이 내게 고통을 주어도 그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이 얼마나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