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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 종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7   이 강연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2007년 6월 23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라디아서 4:22-23)       찬송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귀예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막 4:23)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서에는 귀에 할례를 받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6:10 참조) 또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마음 가죽을 베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렘 4:4 참조) 이런 말씀들을 상고해 보면, 우리가 인간의 둔한 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복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의 폭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몇 옥타브 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왜일까요?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 눈이 밝아졌습니다. 귀가 밝아진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귀는 동물의 귀보다 기능적인 면에서 떨어집니다. 사람은 눈으로 어려움을 감지하지만 동물은 귀로 감지한다는 어떤 의사의 글도 보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그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니 남편도 그것을 먹었고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깨달았다고 하는 성경 말씀이 참 실감납니다. (창 3:6-7 참조)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귀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귀는 음악이나 소리를 감지하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실 새로운 육체 속에서 음악을 접했을 때 우리가 느낄 기쁨이 얼마나 클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듣는 음들이 그때가 되면 어떤 식으로 들릴지 기대가 됩니다. 그렇게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과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들을 살피면, 세상을 살면서 보고 듣는 문제들에 대해 세상 사람보다 훨씬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 듣던 음악을 들으면 어릴 적 일들을 떠올리고 어릴 적 살던 곳에 가고 싶다는 그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그 모든 것이 현실로 나타나 있는 육체에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짧게나마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 하나를 듣더라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오늘도 앞에서 찬송가를 인도하시는 분들이 이런 찬송가를 부르셨습니다.   이 천지 만물 모두 변하나 변치 않는 주여 함께 하소서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십자가 밝히 보여 주소서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나와 함께하소서 (찬송가 531장)   이 찬송가를 들으면서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이 한 곡이 제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면서 불렀던 노래들, 며칠 밤을 새우면서 선곡했던 음악들 전부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우리 개개인을 위해 해 주신 일을 기리는 이 찬송가를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귀가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습관적으로 찬송가를 부르기 때문에 그 노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모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찬송가 한 곡 한 곡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우리는 평생 동안 많은 노래를 부릅니다. 유행가도 부르고 가요도 부르고 가곡도 부르고 동요도 부를 것입니다. 또 음악을 연주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악들을 모두 다 합해도,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찬송가 102장)   하는 이 찬송가와 바꿀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찬송가를 듣고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해주신 일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은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뵙는 날에 우리가 평생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듣는 노래와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가 열심히 부르는 노래들은 모두 다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치는 노래 이상의 노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제 창세기 15장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에는 땅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7절) 고 하시며 땅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8절)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깊이 잠들었는데 어둠이 엄습해 오니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의 후손, 곧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으로 건너가서 사백 년을 지내고 사대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쪼개놓은 고기들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가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준다는, 땅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하십니다. (12-21절 참조) 이 땅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날 그 후손의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결탁되어 있습니다.그런데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땅’이라는 것의 정의가 가끔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일까, 아니면 훗날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야기일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하는 성경 말씀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말씀은 ‘이 땅은 지구의 땅 덩어리를 말하는 것일까, 이스라엘 땅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도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나타난 ‘땅’에 대한 의미는 내용마다 조금씩 다르게 보여집니다. 그런데 창세기 15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땅은 이스라엘 동쪽에 있는 아랍에미리트의 땅도 아니고, 지중해 북쪽에 있는 터키 땅도 아닙니다. 바로 ‘이 땅’이라고 못을 박아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입니다. 큰 강 유브라데에서 애굽 강까지입니다. 애굽 강은 팔레스타인이 끝나는 지점에 흐르는 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그곳을 짚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민족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그곳을 누리고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이런 말씀을 여러분들께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땅에 대한 정의가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창세기 15장 같은 부분에서 정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을 읽어나가면 뒤에 나타나는 선지서들과 전도서, 잠언, 또 시편 등 많은 성경 내용들이 전부 뒤섞여 헷갈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언서 중에 제일 어렵다고 하는 요한계시록은 훗날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날 엄청난 환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도 비슷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마겟돈이라는 곳에서 엄청난 살육전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들이 있고, 십사만 사천 유대인들에 관한 이야기들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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