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복스러운 소망을 안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함이라” 살전 4:13 하는 말씀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을 때나, 혹 나 자신이 죽음 앞에 직면해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내 삶의 주변에서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흔적은 하나도 없고 종교의 껍질과 행위들만 남아 있지는 않는가? 후자의 삶이라면 상당히 피곤하고 저주스러운 삶일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죽음 앞에 소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병 중에 누워있는 사람을 방문해서 찬송가를 불러주는 일이 있습니다. 병자가 어떤 찬송을 요청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부른 찬송과 숨져 가는 그 영혼이 서로 화답을 하는가? 종교적인 행위만 있고, 그 찬송이 병자의 마음속에 아무런 평안이나 즐거움이나 소망을 주지 못하고 물거품같이 떠가지는 않는가? 사람의 양심과 직결되지 않는 예배 의식은 삭막한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런 삶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8 는 이 약속된 말씀을 자기 영혼 속에 받아들이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힌 보배로다 찬송가 469장
이 행복 말입니다. 믿는 성도라면 마음속에 이 평화가 있습니다. 이 평화가 마음속에 없으면, 이 찬송은 머리에 맴돌고 입으로만 흐를 뿐입니다. 이왕 하나님을 믿을 바에야 내가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 판가름을 해야 합니다. 이 전도서 7장은 명확하게 판가름을 해주고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할까요?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지혜자와 우매자가 판가름이 납니다. 여기에서 초상집에 매일 다녀도 괜찮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초상집은 일가친지나 이웃의 초상집이 아닙니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사람이 쓴 일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 주 예수께서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고난 받으신 세상에 내가 무슨 낙이 있어서 세상 것을 그렇게 사랑할 마음이 생기겠나.’ 하는 내용의 짧은 글이었는데, 제 마음 깊숙이 공감을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린도후서 4:10-12
하나님께서는 사도인 자신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지만, 그런 삶으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에 다른 성도들이 생겼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전도서에서 말하는 ‘초상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람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찬송가 404장
하나님이 계시는 그 높고 높은 곳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쓰고 죽음을 맛보신 이 세상이 바로 초상집입니다. 물론 더 초점을 맞추면 이스라엘 땅이지요. 예수님이 세상 모든 인간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는데, 이 세상 무엇으로 그 죽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을 내가 시인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관심하고 모르는 체 한 사람들의 죄는 절대로 용서되지 않는 죄입니다. 이 고마운 사랑을 저버리는 죄야말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 중에 가장 악독한 죄입니다. 제일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대신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도외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삶이 항상 주님의 죽으심과 연결되어 있다면, 내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든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만나고 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욥기 32:19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시편 45:1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주님에 대해 말하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 살아 있느냐, 아니면 내가 그것을 무시하고 사느냐 하는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