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003.08> 만민을 위해 베푸시는 포도주 잔치

- 2001년 4월 19일 저녁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청년이라면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젊음을 만끽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사회에 뚜렷이 남기려는 야망을 가질 것입니다. 그 야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에게는 행복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사람이 추구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정작 그에게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바라시는, 사람 자신에게 꼭 있어야 될 생명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출세해서 많은 재산을 가졌는데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9
 
 
   사람이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한 번쯤은 내세에 있을 심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잔칫집과 초상집에 갈 일이 동시에 생겼다고 합시다.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요? 앞날의 출세를 위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면 잔칫집에 가서 얼굴을 내미는 것이 더 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명백하게 판가름을 지어 놓았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도서 7:1-4
 
 
 
   이 전도서는 보통 사람이 쓴 성경이 아닙니다. 전도서 1장 첫 구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전도자가 솔로몬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한 것은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을까? 이 말이 과연 누구에게나 다 해당하는 말인가, 아니면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또 아름다운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나을까요?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도 있지만, 세례명처럼 거기에 덧붙여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점쟁이에게 가서 돈을 주고 좋은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태어나서 좋은 이름을 가지게 되는 일은 죽은 후에 고급 향료가 온몸에 발라지는 일보다 더 나은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죽은 사람의 시체에 바르는 기름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말씀을 상고해 봅시다. 소망에 찬 영혼은 그 죽음이 절대 한스럽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 소망이 있다면, 그 죽음은 출생하는 날보다 훨씬 낫습니다. 세상에는 태어났으니까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많고, 또 즐겁게 살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도 많고, 뚜렷한 생의 목표 없이 그저 남들이 살아가니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안 사람에게는 죽음 저 편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
우리를 주께서 구했으니 이전에 행하던 악한 일과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온전히 버렸네
나 지금 죄에서 사함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이 육신 장막을 벗을 때도 겁날 것 없겠네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에 예수의 손목을 굳게 잡고영원히 즐거운 천국으로 주 함께 살겠네
(후렴)찬송하세 찬송하세 주님 나를 구하셨네찬송하세 찬송하세 주가 구원하셨네 찬송가 194장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이 찬송에 대해 마음속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이 찬송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었는데, 어떻게 해서 나와 같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을까요? 내가 확실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내 죄를 없이 해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내가 피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얻었다면 어떤 찬송도 다 내 것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 지금 죄에서 사함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이 육신 장막을 벗을 때도 겁날 것 없겠네
 
 
 
   죽음 앞에서도 희망에 차 있잖아요? 이 세상 최고의 군병들이 시가행진을 하면서 부르는 나팔소리보다 내 양심 속에 우러나는 찬양의 소리가 더 힘있지 않습니까? 귓전만 울리는 유행가보다 내 심금을 울려주는 찬송이 더 낫지요.
 
   우리는 복스러운 소망을 안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함이라”    살전 4:13 하는 말씀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을 때나, 혹 나 자신이 죽음 앞에 직면해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내 삶의 주변에서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흔적은 하나도 없고 종교의 껍질과 행위들만 남아 있지는 않는가? 후자의 삶이라면 상당히 피곤하고 저주스러운 삶일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죽음 앞에 소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병 중에 누워있는 사람을 방문해서 찬송가를 불러주는 일이 있습니다. 병자가 어떤 찬송을 요청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부른 찬송과 숨져 가는 그 영혼이 서로 화답을 하는가? 종교적인 행위만 있고, 그 찬송이 병자의 마음속에 아무런 평안이나 즐거움이나 소망을 주지 못하고 물거품같이 떠가지는 않는가? 사람의 양심과 직결되지 않는 예배 의식은 삭막한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런 삶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8 는 이 약속된 말씀을 자기 영혼 속에 받아들이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힌 보배로다 찬송가 469장
 
 
 
   이 행복 말입니다. 믿는 성도라면 마음속에 이 평화가 있습니다. 이 평화가 마음속에 없으면, 이 찬송은 머리에 맴돌고 입으로만 흐를 뿐입니다. 이왕 하나님을 믿을 바에야 내가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 판가름을 해야 합니다. 이 전도서 7장은 명확하게 판가름을 해주고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할까요?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된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지혜자와 우매자가 판가름이 납니다. 여기에서 초상집에 매일 다녀도 괜찮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초상집은 일가친지나 이웃의 초상집이 아닙니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사람이 쓴 일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 주 예수께서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고난 받으신 세상에 내가 무슨 낙이 있어서 세상 것을 그렇게 사랑할 마음이 생기겠나.’ 하는 내용의 짧은 글이었는데, 제 마음 깊숙이 공감을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린도후서 4:10-12
 
 
 
   하나님께서는 사도인 자신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지만, 그런 삶으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에 다른 성도들이 생겼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전도서에서 말하는 ‘초상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람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찬송가 404장
 
 
 
   하나님이 계시는 그 높고 높은 곳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쓰고 죽음을 맛보신 이 세상이 바로 초상집입니다. 물론 더 초점을 맞추면 이스라엘 땅이지요. 예수님이 세상 모든 인간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는데, 이 세상 무엇으로 그 죽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을 내가 시인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관심하고 모르는 체 한 사람들의 죄는 절대로 용서되지 않는 죄입니다. 이 고마운 사랑을 저버리는 죄야말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 중에 가장 악독한 죄입니다. 제일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대신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도외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삶이 항상 주님의 죽으심과 연결되어 있다면, 내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든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만나고 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욥기 32:19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시편 45:1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주님에 대해 말하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 살아 있느냐, 아니면 내가 그것을 무시하고 사느냐 하는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민을 위한 포도주 잔치
 
 
 
   그런데 성경을 보면, 진짜 잔치다운 잔치가 하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베푸시는 한 분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이사야 25:6-9
 
 
 
   하나님께서 간직하신 이 술은 가장 오래 된 맑은 포도주입니다. 텁텁한 포도주만 만들었던 그 시절에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얼마나 맑은 포도주를 얼마나 오래 저장해 두었기에 그것으로 잔치를 베푼다고 했을까요.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석에서 제자들과 함께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마 26:29 하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지상에 임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시는 이 새 포도주야말로 진짜 포도주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래 된 포도주의 맛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든 한 번 멋진 잔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 화려함에 대해서는 각자 상상에 맡깁니다.
 
 
   이 이사야서의 내용은 처음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이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예수께서 어느 날 가나라는 곳에 혼인 잔치가 있어서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로그인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볼수 있습니다.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