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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 하나님의 법으로 서 있는 생명의 경계

   복음서를 읽으면서 14회   마태복음 5:27-32   2001. 3. 24. 강연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태복음 5:27-32)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이 말씀은 가장 어려운 말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쉬운 내용입니다. 깨닫기 어려운 내용 같지만, 또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두가 다 겪는 문제입니다. 인간인 이상 어떤 특별한 병이 있는 것이 아니면 이 말씀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7-28)   왜 ‘여자를 보고’라고 하고, ‘남자를 보고’라고는 하지 않았을까요?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수동적인 반면에 남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남자에게 해당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 그리고 그 이전 역사에서도 유대인들에게는 남자가 우선시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항상 남자를 앞세웠습니다. 성경에는 ‘여자와 아이 외에 몇 명’ 이런 식의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도 남자를 앞세워서 설명한 듯합니다. 이 말씀을 놓고 여자들은 나는 이 문제와 상관없다, 나는 이 문제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해당합니다.사람들은 어떤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 역사 초기에 죄가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창 3:13) 고 물으셨을 때,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핑계를 대었습니다. 여자도 핑계를 대고 남자도 핑계를 대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세월이 갈수록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잠 14:9) 하신 말씀이 점점 더 들어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흑백 TV를 보던 시절만 하더라도 TV 속 여성들의 옷차림에 상당히 많은 제재를 가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정적인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과거에는 허용되지 않던 것이 요즘에는 많은 부분에서 용납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시대가 그러니까.’라고 합니다. 지금은 TV에 여러 채널이 나와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골라서 볼 수 있습니다. 방송에 선정적인 장면이 나와도 이제는 눈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죄에 대해 어디까지 한계를 두어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섹시하다’는 말을 하면 부모가 좋아합니다. 아이도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모르면서 좋아합니다. 옛날 같으면 그 말은 듣고 화를 내어도 한참 내었을 욕인데, 요즘은 다릅니다. 자라 가는 소녀들도 어떻게 하면 이성에게 더 잘 보일까를 생각하고, 남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여자아이들뿐만 아니라 남자아이들도 성형수술을 많이 합니다.또 아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열심히 공부한다고 여기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저도 학생 시절에 방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는 제가 기특해서 형이나 동생에게는 주지 않았던 간식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저는 싱긋 웃으면서 먹었지만, 제가 보던 책 뒤에는 만화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큰 공책 뒤에 있는 만화책을 보지 못하고, 수업 필기를 잘 해 놓은 것을 보시고는 제가 공부를 하고 있는 줄 아셨던 것입니다.요즘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정말 입에 담기도 힘들고 부모가 보아도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을 보며 그 재미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게임 정도가 아닙니다. 결혼한 성인 남녀가 보아도 쑥스러울 정도의 내용을 보고, 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과도 공공연하게 함께 봅니다. 그런 것에 아이들이 그냥 노출되어 있습니다.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와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 당시에 대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 (마 16: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은 아마 예수님도 깜짝 놀라실 정도로 그런 쪽으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영화나 책에도 그런 내용이 양념처럼 들어가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고 움직입니다. 그러한 것이 많이 발달될수록 사람들은 자극적이며 쾌락적인 오락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문제 앞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고 정돈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찬송가 331장) 하고 찬송가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세월을 어디서 보냈습니까? 허랑방탕한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세월을 보냈다고도 하고, 세속적으로 세월을 흘려 보냈다고도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속 방송을 보느라 시간을 다 허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간의 생애는 한 번뿐이고 어떻게 보내든 그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그런 것을 보는 데 매여 그 시간에 자기 생활을 맞추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것에 더 깊이 파고들어 가면 마음이 완전히 자극되어 이상해지기도 합니다.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전 인류가 한 번은 살펴야 할 내용들을 예리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수라고 하는 십계명에도 “간음하지 말라”는 아주 간략한 말이 있지만, 율법을 자세히 보면 이 말은 엄청난 내용을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인간의 몸을 쓰고 세상에 나타나시기 전에는 원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직접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함께 지냈다는 말입니다.제가 열일곱, 열여덟 살 무렵에 해수욕장에 갔습니다. 그 당시 수영복은 요즘 수영복보다는 구식 옷이어서 몸을 상당히 가리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몸매가 드러나, 그림을 그리던 저 같은 사람이 보면 옷을 입은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식 옷일수록 노출이 많은데, 요즘 여성들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또 각선미가 좋다 하면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성경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는데, 남성을 그렇게 유혹하고 유도할 수 있는 태도는 어떠한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쌍방의 죄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려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들도 사춘기를 넘어설 때부터 달라집니다.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 과일이 맺어 갈 때는 그렇게 탐스럽지 않지만, 과일이 다 익으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모두가 그 과일을 탐내게 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완숙기에 들어가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어린아이들이 제 손으로 자기 고추를 만지기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커 가는 동안 손으로 하는 일이 밥을 먹거나 세수를 하거나 닦거나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점점 알게 되지 않습니까?그래서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태복음 5:29)   눈이 보고, 느끼는 감각 속에는 쾌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즐긴다는 문제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는 말씀에 바로 이어서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였거든 빼어 내버리라”는 아주 무서운 말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30)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은 봄으로써 어떤 욕구를 느끼고, 그런 것을 찾아 헤맵니다. 또 더 돋보이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나 유혹하는 과정으로 넘어갑니다.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이상한 방향으로,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고 흘러갑니다.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데에 유혹될 수 있는 도구이며, 유혹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눈과 손을 바로 연결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늙어서 그런 쪽으로는 힘이 없고 생각도 없다.’고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육체가 약해져서 자신은 이 범주에서 이미 벗어나 있으니 그런 죄는 짓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 죄성은 속에 그대로 잠재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하셨는데, 인간이 말하는 자연법칙, 자연조건을 무시하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청년기에 접어든 젊은 사람은 혈기왕성해서 어릴 때는 하지 않던 생각이 들고, 애정의 대상을 찾는 눈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자연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것을 탓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그런 욕구가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기본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구에서 비롯된 다른 것을 쟁취하려는 힘, 다른 쾌감을 느끼는 힘이 있습니다.문제는 그 범주를 넘어섰을 때 일어납니다. 욕구에서 비롯된 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이것을 건전한 방향이 아닌 음란한 방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힘을 키우는 약을 사용하다가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한계를 넘으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1-3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은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런데 다말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형제가 여럿인 경우, 하나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대를 이었습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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