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015.12> 사도행전의 역사를 따라 -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강해를 마치며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2000. 2. 5. 강연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며 살면서도 목적 없는 삶을 살기 쉽습니다. 직장이나 학교 등을 옮길 때나 사업을 할 때도 아무런 의미 없이 할 때가 많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을 그저 아무 뜻 없이 흘려보내야겠습니까? 내가 직장을 옮기는 데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는지, 혹은 내가 어느 지방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지 등 의문을 가지며 매사에 하나님을 생각해 보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름내 생명줄에 달라붙어 바람과 싸우며 펄럭이던 나뭇잎은 가을을 맞이하면 귀뚜라미가 울어 주는 장송곡에 맞추어 바람에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부는 바람에 동쪽으로 가는지 북쪽으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굴러갑니다. 그처럼 우리의 삶을 끝맺으면 되겠습니까?그런데 사복음서와 연결된 사도행전의 내용 속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70인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모두 물러가고, 한 사람이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요 6:67-68 참조) 그 대답을 했던 베드로는 본래 어부였지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기 위치를 굳건히 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결단력 있는 대답을 했는데, 그는 말씀이 자기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언제나 그 말씀을 꼭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그를 한 번 거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가 실패할 것이라고 하셨고, 그 말씀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말씀이 그에게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할 때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며 주님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저주의 말씀이든 축복의 말씀이든 (마 16:17 참조 말씀) 그 자체가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필요없었던 사람은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1) 라고 하신 말씀대로 키에 밀을 올려놓고 막 흔들어대듯 사단이 이 사람을 청구했지만, 그는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2) 하신 말씀대로 멋지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의 소명은 아주 컸습니다.그런가 하면 덧없이 세월을 보내고 나이만 들고서 자신이 무슨 이유로 세상에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수무강 하옵시고.’ 하는 말대로 오래 산들, 그저 나이 먹은 자랑 하나 외에 해 놓은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 비해 사도행전에는 스데반처럼, 짧아도 멋있게 산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스데반은 많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바람 앞의 촛불같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위해서 꿋꿋이 자기 자신을 소진하고 숨졌습니다. 비록 그 인생의 길이는 짧았어도 그 삶은 엄청나게 굵직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던 성령께서 그들을 사용하신 기록입니다. 물론 스데반이 사도는 아닙니다만 사도들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반면 비참하게 흉내만 내다 가 버린 아나니아와 그 아내 삽비라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또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의 반대편에 서서 공격하고 믿는 사람을 잡아 죽는 데 내어 주다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 모두가 하나님의 성령을 거역할 때 바울은 무언가 양심에 찔리는 것이 있었지만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위신이나 생계 수단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고서 세상에서 그를 뽑으셨습니다. 가장 지독한 핍박자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릇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걸어간 걸음은 아마도 이 지상에 태어난 사람 중 제일 뚜렷한 걸음이었을 것입니다.저도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살지만 사도 바울 앞에서는 기가 죽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살다 간 사람이 이 세상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책 저런 책을 살펴보고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을 살펴보아도, 바울만큼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살아간 사람은 이 지구상에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바울의 생애는 길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참으로 컸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 명예나 재산 등 좋은 것을 얻으면 그것을 자녀에게 물려 주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 놓고도 자녀가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혹은 복음을 멀리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에는 ‘내가 이 세상 모든 것 다 자녀에게 주었지만 한 가지를 못 했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육체의 생명을 이어 주고 피를 이어 주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만, 복음이 빠져 있다면 무슨 소용입니까?그러나 바울은 성경에 자기 가족에 대해 자랑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부인이나 자녀에 대한 기록도 없고, 그가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조차 언급이 없습니다. 바울이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평생 연구하다 늙은 사람도 있습니다만, 바울은 그런 것에서 초월해 있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낳은 자녀들이 역사를 두고 태어나 살아가는 이곳에 복음의 씨앗을 남겼습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듣고 확실히 믿으면 저 위에서 같이 만난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2:19) 고 하며, 하나님께서 확실히 믿은 사람들을 불러올리실 때, 저 위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를 누누이 설명해 놓았습니다.바울이 살아간 모습을 보면 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내 가족이나 형제들, 부모님, 그리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얼마만큼 애틋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했습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마음을 가지고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조차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정말 비참할 것입니다.제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 세상을 살며 고생밖에 모르던 제가 어떻게 하다가 당신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까!’ 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날 때가 한 번씩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하기에, 내 앞에 놓인 시간이 참 짧다고 생각됩니다. 위대한 사람들이나 그런 일을 한다고 미루지 말고, 우리 보통 사람들도 성경을 가까이하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는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사는 동안 자신이 절대로 낙오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참 멋쟁이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의 신분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



* 온라인 쇼핑몰

글소리 PDF 웹북 펼쳐보기


* PC 버전 홈페이지 전환



Copyright (c) 2025 (주)많은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