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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피 속의 산소처럼 소중한 성경 속의 믿음

-2004년 4월 24일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여러분들은 집 안이나 밖에서 활동할 때에 맑은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공기가 오염되었음을 느끼는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말 못하는 동물과 곤충도 공기가 나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기 오염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나무나 풀들일 것입니다. 대기 오염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가 호흡기를 통해 직접 들이마시는 이 공기의 오염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런데도 실제 생활 속에서 맑은 공기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맑은 공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공기가 좋은 곳으로 가서 살아야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기가 제일 나쁜 서울에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삶의 의욕을 불태우며, 생존경쟁에서 이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서울에 비집고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서울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공기가 나쁜 곳인데도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이 시골에 가면 초등학교 다닐 때 배운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하면서 좋아하고, 산에 올라가서는 ‘아, 공기 좋다! 야호!’ 하고 나서 담배를 피웁니다. 담배 맛이 참 좋대요. 건강을 위해서 산에 올랐다면 담배를 끊는 것이 더 건강에 이로울 텐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시골에 가서 어릴 때 접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고, 그때 쓰던 것들에 마음을 쏟으며 좋아합니다. 그런 옛 풍습이나 산과 들은 좋아하면서, 옛날의 그 맑았던 공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힘이 빠지고 살아갈 기력도 없이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희망에 찬, 장래성 있는 이야기를 해주면 어떻겠습니까? ‘아이고, 나는 다 죽어가고 있는데 뭐.’ 라고 한탄할까요, 아니면 그 희망찬 말에 솔깃한 심정일까요? 틀림없이 솔깃한 심정일 것입니다. ‘당신 부인이 시장 보고 남은 돈으로 복권을 샀는데, 오늘 확인해 보니 당첨되었습니다.’ 하면 죽어가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에는 소망이 없어도 가족들 살아갈 길은 있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귀로 들리는 말이나 코로 호흡하는 공기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감각으로 느끼고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무시하지 않는 것이 생각 있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소중한 믿음
 
 
제가 어릴 때 불렀던 노래 중에 참 서글픈 노래가 있습니다.
 
 
날 사랑하는 부모 형제 이 몸을 기다려정처도 없이 헤매는 이 내 신세언제나 나의 옛 고향을 찾아나 가볼까이 세상에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 아 그리워라 나 살던 곳 멀고 먼 옛 고향
 
 
부모님을 떠나 타향에서 살 때에는 얼마나 이 노래가 제 가슴을 설레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후로 노래가 바뀌었습니다.
 
 
보이는 것 의지 안하고 믿음으로내 주와 한 가지 걷는 것 참 행복 아닐까예수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단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나는 믿습니다  (합동찬송가 206장)
 
 
믿음이라는 것이 별게 아닌 것 같아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믿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믿음이라는 것이 중요한 작용을 하는데, 하물며 믿음의 절대적인 주관자가 믿을 것 없는 이 세상의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큰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귀신들린 딸아이를 살리려 예수께 청한 여자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8) 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눅 17:6) 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믿을 만한 대상이 흔치 않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의지한다, 기댄다, 맡긴다’는 의미로 쓰이곤 하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평생 가지고 살던 직업을 내동댕이치고 뜨내기 같은 어떤 선생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선생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고, 선생을 따라간 사람들도 학식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사렛이 고향인 그 선생은 직업이 목수일 뿐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조목조목 따져보자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별 것 아닌 것 같은 인간적인 면모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 선생에게서 2천 년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훈이 발표되었고, 그 교훈을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세계 곳곳에 전파하였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이나 예일 대학 등과 같이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 학교들을 조사해 보면, 그 저변에는 성경의 이념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 교육 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의 활동에 의해 생긴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개화기를 지나오면서 그런 학교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오늘날의 교육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느냐 하는 것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교육에 지친 사람들이 성경을 다시 찾았을 때 ‘참된 교육을 우리가 도외시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음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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