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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 성경은 너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24회 북미지역 성경탐구모임 중 2003년 12월 29일 오후 강연 - 창세기 2장, 3장을 중심으로 -   제가 막 강당 안에 들어올 때 여러분이 부르는 찬송가를 들었습니다.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찬송가 234장)     저는 오늘 이 집회에 오기 전에 주일학교 교사들과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니 제가 이 복음 안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구원받으셨고, 저는 이 교회 안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었을 때에야 구원받았습니다.     이 교회 안에는 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복음을 접하게 되면 아이들이 구원받기 어렵다고 말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대체로 그렇게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정말 성경에 대하여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2년 전 우리가 LA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한국과 여러 다른 지역에서 오신 젊은 교사들이 함께 창세기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다 읽어가면서 구약이 참으로 그분, 바로 예수님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바울이 어떻게 디모데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젊은이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를 이집트의 왕궁으로 데려갔을 때 그의 어머니가 와서 그를 가르쳤습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알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데 필요한 지식을 확실히 얻게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아이들에게 복음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다. 이것에 대해서 미리 너무 많이 알게 되기 때문이다.’ 라는 잘못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복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들이 참으로 구약에 약속된 구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디모데를 만났을 때에는 신약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디모데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구약 성경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이 규율을 깨야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복음을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을 배우기 이전부터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몇 개월 전에 저는 아이를 얻었습니다. 제게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약 5개월쯤 전에 의사 선생님이 저를 불러서 ‘당신의 아기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만일 임신 중절을 원한다면 검사를 지금 받아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지금 검사를 받아야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아이가 너무 자라기 전에 검사를 받아야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검사지요? 얼마나 위험한가요?”     “글쎄요, 이백 명 중 한 명은 사망합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면 아이를 포기해야하는가? 다섯 달 동안은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괴로움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어느 날 저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에게 정상적인 아이를 주신다면 어떻게든 이 아이가 당신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알도록 가르치겠습니다.’     이사야서 59장 20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21절)     우리 모두는 이 약속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제 아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기에는 좀 이를지 모르지만, 저는 아이가 잘 자라서 복음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창세기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 그에게 약속을 합니다.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창 22:17 참조)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후손들이 매우 많아서 셀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이 아브라함이 그 자녀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는 백 세 때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을 낳기 전에 그의 아내의 여종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고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은 그두라라는 아내를 얻었습니다.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주 자세히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멀리 보내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자녀들도 모두 그가 죽기 전에 이삭으로부터 멀리 내보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너에게 축복을 주고 네 아내 사라에게도 축복을 준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축복하여 큰 나라를 이루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언약, 나의 약속에 관한 것은 항상 이삭과 함께 있으며, 이삭에게만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처음부터 아주 세심하게 돌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늙고 이삭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늙은 종을 불러, ‘너의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고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서 잘 들어라. 너는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아버지의 땅, 밧단 아람에 돌아가 내 족속 중에서 그의 아내를 찾아서 그녀를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라.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하느니라.’고 이릅니다.     그러자 종은 아브라함의 고향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리브가를 만납니다.     이삭이 자녀, 즉 에서와 야곱을 낳고, 에서가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의 여인과 결혼했을 때, 이삭과 리브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그들에게 근심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빼앗았을 때, 리브가는 야곱에게 자기 아버지의 땅 하란으로 도망가라고 합니다. 자기 오빠가 살고 있는 하란에서 아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촌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녀를 돌보아서 이 씨가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실제로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그의 언약이 그의 혈통인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서 이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저는 정말 구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지금은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 예언서들을 읽어보면서 전보다 조금 더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교사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유는 우리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거대한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그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수한 복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을 해야 합니다. 디모데가 배웠던 것처럼, 어릴 때부터 복음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찬송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그 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찬송가 234장)     이렇게 해야 우리가 이사야 59장에서 읽었던 구절이 우리 삶 속에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냥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최소한 구약 성경을 유대인들에게도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 있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디모데후서 3장에 이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이 강당에 들어설 때 그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것에 관심이 더 갔습니다.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 때문에 어젯밤에 잠을 많이 못 잤습니다. 그 전날 밤에는 4시간 잤고. 어젯밤에 설교 말씀을 들으려고 했지만 절반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잠들고 싶지 않아 숙소로 돌아가 이내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6시에 일어났습니다.     혼자서 아침을 먹으며 제가 어제 이야기했던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후에 유대인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로마 병정에게 넘겼습니다. 십자가에서 단순히 돌아가시기만 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분의 모든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매도 맞았습니다. 먼저 그들은 가시나무로 면류관을 만들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갈대로 그를 쳤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그를 돌려세우고 등을 쳤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몸 전체는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는 심지어 십자형 나무를 어깨에 메고 가야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도록 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입을 치며 말했습니다. “네가 만약에 그리스도면 누가 때렸는지 말해 봐라.” 그의 어깨에 십자가를 지우고 산을 걸어 올라가게 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예수님에 대하여는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동시에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한번 이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부활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했을 때 그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문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문도 닫혀 있었지만 그가 나타났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3) 라는 말씀처럼 실제로 그의 몸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가 제자들에게 돌아왔을 때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랍비가 여기 오셨다. 우리 선생님이 여기 계셨다.” 도마가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도마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이리로 와서 네 손을 여기, 여기에 넣어 보라”     그의 몸은 원하는 곳이면 어디나 나타날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여전히 육체 속에 그의 증거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온전한 몸으로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못 자국 난 손과 허리를 그대로 두셨을까요?     어느 날 저는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 날 우리도 예수님처럼 변화될 때 그의 몸의 징표가 우리와 유일하게 다른 점이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이 들어있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나의 주를 손에 못자국을 보아 알겠네  (찬송가 231장)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며 제 방의 창밖을 보니 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뾰족한 산등성이가 밝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런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제 그림은 지금의 풍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니께서 늘 부르시던 찬송가가 생각났습니다.     해지는 저편 새 하늘에는우리 주 예수 계시는 곳고난은 가고 찬란한 새벽영광의 날이 밝으리라  (복음성가 102장)     해지는 저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가 해가 지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지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일찍 동이 텄을 때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오셔서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한다” 마 16:2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해질 무렵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리셨고, 동이 틀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일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배웁니다. 어제까지 성경의 맨 첫 장을 공부하였습니다. 약 다섯 시간 이상 이 한 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실제로 기록된 것의 약 일 퍼센트도 다루지 못했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구약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믿습니다. 구약은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를 봅시다.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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