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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 에스더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

 -  2008 북미지역 성경탐구모임     2008. 12. 28. 강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4-17)   성경에 나타난 숫자의 의미우리는 앞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그가 신앙적으로 겪었던 사건들과 육체적으로 겪었던 사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많을 때에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낳았고, 사라가 죽은 후에도 수십 년간 여러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도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것과 꼭 닮은 역사를 밟아 갔습니다. 늙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후에도 자녀들을 얻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다 갔다는 내용 속에는,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는 데 내어 주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의 생명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호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구약의 여러 선지서들 속에도 숨어 있습니다.또 우리 개개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그냥 덧없이 살아가는, 산 것 같지만 죽은 상태에서 살아가던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에게 쏟아 부어진 그 사랑을 알고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의 생명력이 끝까지 가는 것같이, 거듭난 우리 개개인들도 육에 속한 복과 영적인 복을 함께 받으면서 복음을 위해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이제 아브라함 이후에 율법을 받는 이스라엘 민족과 그 율법을 받는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모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모세가 몇 년을 살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는 사십 년, 사십 년, 사십 년 이렇게 세 번에 걸쳐 구분된 삶을 살았습니다. 처음 사십 년 동안 그는 바로의 궁에서 애굽의 왕자로 살았고, 애굽 사람을 쳐 죽인 후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그 다음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애굽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와 광야로 들어가 광야에서 마지막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백이십 세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행 7장 참조)모세는 시내 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뒷부분에 나타나 있는 내용입니다. 율법을 받을 때의 순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성막에 대한 내용을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다른 규례들도 많지만 먼저는 성막을 짓는 내용으로부터 율법이 기록되었습니다. 유월절을 시작으로 모세를 통해 율법이 기록되고, 유대 민족들에게 전해지는 순서도 자세히 살펴볼 만합니다. 이렇게 모세는 열두 지파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받아서 전해 주는 역할을 하고 그 인생을 마쳤습니다.그런데 이 모세의 삶 속에 나타나는 많은 내용들은 우리의 삶과도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땅에서 사십 년을 살았고,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지냈고, 또 시내 광야에서 사십 년을 지냈다는 말씀을 우리 개개인에게 비추어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생성되고 조직되어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남자와 여자의 씨가 만나서 한 아이가 생성되면 그 아이는 어머니 뱃속에서 약 사십 주를 지내고 태어납니다. 왜 인간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여섯 날과 쉬셨다는 한 날까지 합친 그 일곱 일을 사십 번 지나고 나서야 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요?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는 ‘40’이라는 숫자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을 시험하는 숫자임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를 맞이했을 때도 사십 일 사십 야 동안 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물이 땅에서 솟아 올라왔습니다. (창 7:12 참조)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도 먼저 사십 일 사십 야를 광야에서 주리신 후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 4:2 참조) 그 외에 블레셋인 골리앗이 사십 일 동안 하나님을 욕했고, 그 후에 다윗의 돌에 맞아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삼상 17:16 참조) 그런데 이 숫자들은 성경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는 말씀과,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내 생명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과 이 세상의 섭리, 역사의 섭리와 내 육체의 생명의 섭리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모세는 사십 년이라는 생애를 세 번 살았습니다. 왜 세 번이었을까요? 팔십 년을 살다 죽을 수도 있고 백육십 년을 살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처럼 복 받은 사람은 한 이백 년 정도는 살아도 될 것 같은데 백이십 세에, 그것도 스데반의 설교에서처럼 정확히 사십 년, 사십 년, 사십 년이 세 번 구분되는 삶을 살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3이라는 숫자는 또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성경에서 3이라는 숫자를 또 생각해 봅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요나입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던 예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 12:39-40 참조)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사흘 만에 영원한 육체를 가지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어느 날 성전에 나타나셔서 유대 민족을 향해 부르짖으시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 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세 분의 교제하심으로 우리 인간의 육체가 세상에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사십 주를 어머니 뱃속에서 먼저 지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세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영원이라는 시간대를 맞이하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해야 합니다. 철두철미하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성경의 방법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을 살아가고 또 이 육체 속에 갇혀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참 특이하게도,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하신 그 피를 형성하고 있는 물질 중, 적혈구는 수명이 120일입니다. 생성된 적혈구는 120일 동안 온 몸을 열심히 다니는데, 심장에서 허파로 갔다가 산소를 머금고 온 몸을 달립니다. 그리고 마치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딤후 4:7) 하셨던 사도 바울의 간증처럼 끝까지 다 달린 뒤에는 그 색깔을 잃고 변과 함께 빠져 나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 년이라는 기간은 적혈구의 주기가 세 번 바뀌는 기간과 거의 같습니다. 그것이 우연일까요? 한 해를 사는 동안 우리는 그냥 365일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동안 내 몸속에서는 이 적혈구가 세 번 주기로 바뀌었습니다. 세 번 옷을 갈아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 해 한 해 살아가다가 세상을 떠납니다.또 성경에서 중요하게 나오는 숫자 중에 12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두 지파이고, 사람의 머리에서 시작해 얼굴까지 연결되어 있는 신경이 열두 개입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이러한 우리 육체의 섭리를 바라볼 때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도 숙연해져야 합니다. 내 육체에 피가 흐르고 그 피가 흐름으로써 내 생명이 유지되고 내 마디와 관절과 근육들은 나의 머리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치 내 머리가 모든 것을 명령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생명을 담고 있고 내 영혼을 품고 있는 피가 내 뇌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도 그러한 모습을 띠고,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도 그와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성전의 의미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명령을 받은 기간은 사십 일이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제일 먼저 받은 것이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입니다. 모세는 돌판을 받아서 산을 내려왔을 때 자신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사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보고는 그 돌판을 깨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내 산에 올라서 하나님께 두 번째 돌판을 받습니다.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은 첫 번째 언약과 새 언약의 그림자입니다.두 번째 돌판을 받으면서 모세는 하나님께 세밀한 지시사항을 받았습니다. 먼저 그 돌판을 넣어둘 한 장소, 곧 언약궤에 대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순서를 보면 아무렇게나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언약궤를 만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집을 지을 때 겉에서부터 지어 들어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대해 안에서부터 설명을 해 나오십니다. 이것이 사람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의 차이입니다. 이는 사람은 외모를 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먼저 보신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언약궤를 설명하신 다음에는 그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와 언약궤가 놓일 지성소의 휘장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인 십계명이 쓰인 돌판이 들어갔습니다. 지성소 밖에는 향로가 있고, 진설병을 놓아둔 상이 있고, 또 일곱 등대가 놓였습니다. 그곳을 우리는 성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지성소와 성소를 합친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뜰이 하얀 세마포로 둘러 쳐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들은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진행해야 했는데, 성막 뜰에 있는 문에서부터 성소 문, 지성소 문까지, 문도 세 번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 문이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합니다.그런데 우리 육체는 또 어떠합니까? 성경을 읽다 보면 한 지체에 대해 무언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5절의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말씀입니다. 손을 대지 않고 귀를 막을 수 있습니까? 눈도 감을 수 있고, 코도 숨을 멈출 수 있지만 귀만은 우리가 스스로 막을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는 지금처럼 종이를 가죽으로 싸고 장절에 숫자까지 붙여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책도 없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대제사장이 읽어 주면 사람들은 그 내용을 들었습니다.그런데 예수께서 어느 날 오셔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는 말씀도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각자가 성경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읽다 거듭나는 분들도 많고 또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셨듯이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듣도록 되어 있습니다. 들은 말씀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됩니다.우리 귀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겉귀가 있고 중간귀가 있고 속귀가 있습니다. 겉귀에는 귓바퀴가 있는데 공기에 실려온 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동그랗게 생긴 귓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렇게 들어간 소리가 고막을 치는데, 그 고막은 세 장의 얇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저도 어떤 의학책에서 이러한 것을 읽고는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소리가 고막을 울려 주면 주파수가 바뀌면서 중간귀로 이동합니다. 중간귀에는 조그마한 뼈가 연결되어 있는데 그 뼈가 또 세 개입니다.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입니다. 그 세 계단을 타고 속귀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속귀로 들어간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달팽이관입니다. 달팽이관 안에는 세 개의 방이 있습니다. 소리가 움직일 때마다 뇌 속에 있는 청신경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주파수가 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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