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유리스
3편 주먹에는 주먹으로
“...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굽기 21:23-25)
1장
어린이들을 태우기 위해 버스는 부두 암벽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어린이들이 엑소더스 호에서 한 명 한 명 내릴 때마다 부두에 모인 군중들은 힘차게 박수를 쳤고, 부두는 악대의 연주소리로 떠나갈 듯 흥겨운 분위기가 되었다.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고통도 싸움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을 환영하는 공식적인 축하행사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버스에 오른 어린이들은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부두를 떠났다.
“키티!” 카렌은 창문을 열고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키티는 카렌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이들을 태운 버스는 사라지고 군중들도 하나 둘 흩어졌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부두는 예전의 모습대로, 하역인부들과 경비를 서고 있는 영국군 병사 몇몇이 남았을 뿐이었다. 색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방금 어린이들을 태워 왔던 엑소더스 호가 삐걱거리며 물 위에 떠있다는 사실이다.
키티는 갑자기 엄습해 오는 낯선 기분에 사로잡혀 가만히 엑소더스의 난간에 기대어 섰다.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 것인지 인식이 잘 되지 않았다. 키티는 눈 앞의 하이파를 내다보았다. 왼쪽에는 모술 유전에서 끌어온 송유관의 끝 부분인 석유탱크와 굴뚝이 있었고, 가까운 암벽 앞에는 엑소더스처럼 간신히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알리야 벳의 낡아빠진 배가 십 여 척 보였다.
“아름다운 곳이지요?”
뒤를 돌아보니 아리 벤 카난이 키티의 뒤에 서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팔레스타인에 오신 손님을 하이파에서 맞이합니다. 하이파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첫 인상을 좋게 하지요.”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요?” 키티가 물었다.
“대여섯 곳의 청년 알리야 벳 본부로 나뉘어 갈 겁니다. 키부츠에 본부가 있는 곳도 있고, 본부에 부락이 달린 곳도 있지요. 며칠 안으로 카렌의 거처를 알려줄 수 있어요.”
“고마워요.”
“어떻게 할거요, 키티?”
키티는 쓴 웃음을 지었다.
“방금 어떻게 할까 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참이에요. 벤 카난 씨, 저에게는 이곳이 낯설어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하니 좀 어이가 없네요. 키티 프레몬트는 간호사라는 확실한 직업이 있고, 간호사 자리는 어딜가나 마련할 수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요.”
“내가 도와주고 싶소.”
“당신은 바쁜 사람이잖아요. 괜찮아요.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게요.”
“내 생각에는 당신에게는 알리야 청년단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소. 나와 가까운 친구가 청년단 책임자니까 예루살렘에서 만나도록 해주겠소.”
“말씀은 고맙지만, 당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폐라니, 당치 않아요. 그 정도를 못하겠소? 내가 며칠 동안 당신 옆에 있는 것이 거슬리지만 않는다면 자동차로 예루살렘까지 모셔다 드리겠소.”
“일부러 그렇게까지 하시지 않아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아리가 말했다.
키티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려 했다. 낯선 땅에 혼자 있다는 것이 불안했던 것이다. 그녀는 미소로 아리에게 답했다.
“됐소,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오늘은 통금시간 때문에 하이파에서 묵어야 할거요. 우선 필요한 물건들만 간단히 꾸려요. 짐이 많으면 영국군이 가방을 쉴새없이 뒤질테니. 나머지 짐은 묶어서 세관에 맡기도록 합시다.”
통관이 끝나자 두 사람은 곧 택시에 올랐다. 택시는 유대인 거주지역 안에 있는 한 여관 앞에서 멈춰섰다.
“이곳에서 머무는 편이 좋겠소. 나는 산 밑에서 자동차 한 대를 구해야겠소. 저녁 식사 때까지는 돌아오도록 하겠소.”
그날 밤 아리는 눈앞이 탁 트인 카르멜 산마루의 어느 레스토랑으로 키티를 데리고 갔다. 눈 아래 펼쳐진 경치는 숨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산허리는 푸른 수목으로 우거졌고, 반쯤 가리워진 네모 반듯한 아랍 양식의 검은 돌집, 부둣가 아랍인 구역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황금빛의 전등불들이 켜져 있었다. 키티는 무엇보다 하이파 유대인 구역의 현대적인 멋에 놀랐다.
웨이터가 그들에게 다가와 영어로 말하고, 아리를 아는 5, 6명의 사람들이 와서 인사를 할 때쯤 되어서 키티의 낯선 감정도 많이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친 후 브랜디를 마셨다. 키티는 눈 아래 펼쳐진 파노라마를 넋 잃은 듯이 바라보며 어느새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도 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생각하는 거요?”
“그래요. 어쩐지 내겐 현실 같지 않아서요.”
“우리도 꽤 문명화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나도 때로는 상냥해진다는 것을 곧 알게 될거요. 당신에겐 아직 감사하다는 말도 못했소.”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이 아름다운 곳을 보여주시곤, 이 이상 더 어떻게 저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밝히실 수 있겠어요?”
완전히 어둠이 깔린 카르멜 산 전체 이곳저곳에 전등불이 켜져 아름다웠다. 몇 사람만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경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아리는 키티에게 브랜디 한 잔을 더 따라주고 잔을 맞대었다.
갑자기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던 대화가 끊겼다. 영국군을 실은 트럭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레스토랑 옆에 와서 정지했던 것이다. 트럭으로 인해 레스토랑은 외부와 차단되었다. 대위 한 사람이 사병 여섯을 대동하고 들어와 넓은 실내를 샅샅이 살폈다. 그들은 테이블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간혹 걸음을 멈추고는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언제나 있는 일이니 곧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될거요.” 아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인솔자인 대위가 아리의 테이블 쪽을 보곤 그리로 왔다.
“누군가 했더니 아리 벤 카난이군.” 대위는 비꼬는 투로 말을 건네왔다.
“꽤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고 있었군. 다른 곳에서 장난하며 지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자네 이름을 잊지 않았다면 소개를 하겠네만....” 아리가 말했다.
대위는 이를 꼭 다문 채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자네 이름을 잊지 않고 있지. 자네를 지켜보고 있다는 거네, 벤 카난. 에이커 감옥이 자네 오기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지. 하긴 판무관께서 이번에는 자네 목을 매달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대위는 아리에게 빈정대는 경례를 붙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멋진 환영이네요. 무슨 저런 사람이 있지요?”
아리는 키티의 귀에 대고 말을 했다. “알란 브리지스 대위인데 하가나의 제일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이요. 하이파 지구에 있는 아랍 측과 영국 측 동태를 항상 샅샅이 살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까 저렇게 행동하는 것뿐이라오.” 그 말을 들은 키티는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영국군 순찰대는 신분증을 제대로 갖고 있지 않은 유대인 두 사람을 연행하고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이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영국 국가를 연주하며 그들을 비꼬았다.
영국군 트럭이 떠나자 레스토랑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나, 키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과 사람들의 침착한 태도를 보고 좀 어리둥절했다.
“얼마 동안 지내다 보면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겁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키티를 보고 아리가 말했다.
“곧 이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거요. 이곳은 화가 난 사람들로 가득 찬 땅이오. 며칠 지내보면 편안하고 조용한 날들이 오히려 더 지내기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겁니다. 여기 온 걸 후회할 건....”
그때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 때문에 아리의 말은 중단되었다. 곧 이어 거대한 불덩이가 화난 듯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 주위를 밝혔다. 뒤이어 폭발이 또 일어났고, 레스토랑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정유소다!”
“정유소가 폭파됐다!”
“마카비의 습격이다!”
아리는 키티의 손을 황급히 잡았다. “나갑시다. 여긴 10분도 되지 않아 영국군들로 들끓을 거요.”
레스토랑 안은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아리는 재빨리 키티를 이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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