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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 보이지 않는 왕

- 복음서 강해 중에서 2001년 2월 17일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태복음 4:23-25)
 
 
이 내용은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행하신 초기의 행적들로, 짧은 기록입니다만 상당히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을 보면, 의사가 병자에게 의술을 베풀어 병을 낫게 해주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기적을 한 번쯤 겪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오셔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육신적인 병을 고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병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힘이 없고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3), (막 2:17) 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 보다는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마 9:12 참조)
 
 
그러한 내용으로 볼 때 여기에 나타난 이 많은 병자들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대등한 위치로 서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낮은 위치로 내려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이 낫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람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도 강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모든 것에 만족하고 모든 것이 좋고 신체가 건강하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행복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는 의지할 대상이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하디 약한 사람들에게는 의지할 대상을 찾으려는 바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에 다니시면서 “나를 따르라” 하고 부르실 때, 이 병자들은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중풍병자, 소경, 간질병자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까? 이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그저 바라볼 대상, 병을 낫게 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는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태복음 4:17-22)
 
 
이들은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 자신의 생계 유지를 위해서 자기 집안 대대로 이어졌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물고기를 잡는다든지 그물을 깁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르셨을 때, 이들은 하던 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먹고 사는 육체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살아가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는 새 삶을 보이고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르셨을 때,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옛 삶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각색 병든 자, 중풍병자 등은 제자들과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해도 힘이 없고, 따르려 해도 힘이 없는, 인생의 막다른 한계에 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고기를 낚던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만, 이 사람들은 평생 병을 겪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에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90:10)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병과 수고와 슬픔. 이런 것들이 우리 수한이 다 찰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볼 때에 우리 인간의 생애 자체는 무언가 모자란다는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태복음 4:23-25)
 
 
갈릴리는 이스라엘 북쪽 지방이고 이스라엘 땅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은 유대 남쪽에 있습니다. 아주 먼 거리입니다. 데가볼리*는 ‘열 고을’이란 뜻으로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각색 병자들도 많았습니다. 중풍병자는 움직일 수 없지요. 간질하는 사람은 언제 발작해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이상한 데 홀려 있습니다. 오늘날의 종합병원 같은 곳에 모여 있는 온갖 고통에 빠진 자들과 앓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혜택을 주셨습니다.
 
 
이런 내용이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역사적으로는 그 시대 사람이 먼저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인간적인 조건에서 볼 때 무언가 부족하고 뒤처지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고치신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이런 내용을 가지고 좀 생각해 봅시다.
 
 
약속을 믿고 따라간 사람들
 
 
마태복음 4장 22절에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하신 말씀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신 하나님 아들의 행적 초기에 이러한 일들이 착착 진행되어가는 것을 보면,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는 구약 성경의 한 사실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희로애락을 누리고 사는 어느 조용한 나라, 이곳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당시 역사를 보면 통치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보다는 한적했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살던  아브람에게 조용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나를 따르라”는 말과는 표현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만, 명령을 들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같습니다. 아브람이 그 말을 듣고 지시하신 땅으로 들어간 것은 그 명령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했을 때, 이들은 그 말을 듣고 배나 그물, 자기 아버지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갔듯이, 이스라엘 땅에서 아주 먼 지역에 살던 아브람은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과거 것을 놓아두고, 자기가 살던 땅을 떠나 전진해 나갔습니다. 아브람은 그 아버지와 가족들을 데리고 계속 서쪽으로 가다가 도중에 자기 아버지가 죽은 후 이스라엘 땅, 곧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가 나중에 이름이 바뀐 아브라함입니다.
 
 
자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5) 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받았지만 그 땅은 다른 민족의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 살면서 매우 불안했습니다. 그에게는 집에서 기른 318명의 훈련받은 종들도 있었고 재산도 꽤 많았습니다만, 자녀는 없었습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하면서, 자기 종이 자신의 상속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15장 참조)
 
 
그 말을 듣고도 자녀가 없자 아브라함 부부는 걱정이 되었고, 본처인 사라의 요청으로 아브라함은 사라의 여종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처인 사라에게서 태어날 아들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은 열두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대를 이어가면서 그 땅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숫자도 적고 다른 민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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