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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자라는 믿음

- 2009 유럽지역 성경탐구모임, 2009. 10. 20. 강연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은혜’와 ‘구원’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베드로전서 1:10-11)     이 성경 구절을 한국어로 읽는 분들은 이 문장이 기록된 순서와 방법 때문에 혼돈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이라는 말을 빼고 읽어 보십시오. ‘선지자들이 이 구원에 대하여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고,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했다’는 한 문장이 됩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라고 하니까, 이 구절을 읽을 때 구원과 은혜를 하나로 합쳐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연구하고 살피고 상고한 사람들이 바로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 한참 전인 아벨 시대 때부터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아벨에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이 세대가 담당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1:51 참조) 선지자는 예언을 하기도 했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본래 선지자의 임무였습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의로운 제사를 드린 아벨에 대해서 선지자라고 했고, (마 23:34-35 참조) 아브라함과 모세도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창 20:7, 신 34:10 참조)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무엘상에서부터 등장합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 선지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사야, 좀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무엘, 엘리야를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부터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무엘은 예수님 때로부터 거의 천 년 전 사람인데, 성경은 이런 선지자들이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했다”고 했습니다.   “너희에게 임할 은혜”는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해 받으시고 살아나신 사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이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이 구원이 무엇입니까? 그 앞 9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은 성령이 내리고 사도들의 입을 통해 방언이 일어난 오순절 사건 이후 세상에서 자라나고 있는, 교회에 주어진 특권입니다. 22절에 보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에 순종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물론 신약시대의 많은 사도들이 발표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와 ‘구원’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물론 같은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 곧 하늘에 있는 복을 세상에 가져다줄 수 있는 한 사람 예수께서 죄악 세상에 나실 것을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이 구원에 대해 연구하고 살폈고 상고했습니다. “너희에게 임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에는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6절) 라고 하여 은혜를 깨달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그 피로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해 주셨는지 우리가 깨달은 것을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은혜가 모두 다 같은 은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는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5절) 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 말은 ‘두 번 덕을 얻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은혜’, 영어로 ‘grace’라고 표현된 말과는 뜻이 다릅니다. 두 번째 은혜를 얻기 위해서 한 번 더 깨달아야 된다거나 침례를 한 번 더 받아야 된다는 말을 마구 지어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두 번 은혜를 얻는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한 번 더 나아감으로써 그들에게 한 번 더 덕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8장, 9장에는 마게도냐 교회에 따로 주어진 은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연보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은 성도 섬기는 일을 위해 지극히 가난한 중에 후한 연보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헌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은혜’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gift’, 즉 ‘선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8:4 참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6절) 는 구절은 참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한 번 은혜를 받았는데 그 위에 또 은혜라고 했습니다. 각양 좋은 선물들이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고 하신 말씀에서처럼, (약 1:17 참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선물을 우리 모든 인류에게 다 부어 주고 내려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 은혜가 사람들에게 넘친다고 하셨습니다. 즉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는 말은 예수의 피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은혜에 우리 개개인이 마치 탯줄에 연결되듯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1장에는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0절) 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얼마나 강력한지,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화해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임할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알고 내가 깨달은 구원보다 훨씬 큽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순종해 깨달은 구원이 우리 안에 간직되어 있기에,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어떤 것인지, 그 크기가 얼마만한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점점 알아 가게 됩니다. 에베소서에는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깨닫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3:19 참조)   그러나 ‘이 구원에 대해 임할 은혜를 예언했다’는 말씀을 모두 다 같은 의미로 생각해서 ‘그 은혜가 그 은혜’라는 식으로 여기면 구원받은 뒤 더 이상 자랄 것도 없고 알아 갈 것도 없습니다. 나중에 구원을 의심하게 되기도 하고, ‘구원받았으면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에 온갖 데 다 찾아다니고, ‘침례 한 번 더 받으면 마음이 후련해지는가 보다.’ 해서 엉뚱한 데 가서 침례를 다시 받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일평생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마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 너희가 받은 이 구원은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살폈고 상고했던 것이고, 이 선지자들은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했다고 합니다. 이 은혜의 실체는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거듭난 우리 마음에 말씀이 이식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구원은 100% 이루어졌지만, 살아가면서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베드로전서 1:13)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실 때 내가 받은 구원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죽어 봐야 알지, 주님 오셔 봐야 알지.’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은혜’는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은 후 부활하시고 언젠가 세상에 다시 돌아오실 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가져다주실 엄청난 복을 말합니다. 성경을 통해 마음속으로 믿어졌고 믿고 있는 복이 현실로 나타나 내 육체에 이루어지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질 첫 번째 변화는 바로 부활입니다. 그때 썩을 우리 육체는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 앞에 변화된 몸으로 나타나셔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눅 24:41-43 참조) 변화된 예수님의 몸은 소화하고 배설하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후 5:4) 하신 대로, 음식을 완전히 소화시키고 완전히 소진할 수 있는 힘이 그 몸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만유인력이나 중력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완벽한 육체를 가지고, 모든 것을 소화하실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닫아 놓은 방에 있을 때도 그 가운데 함께하셨습니다. (요 20:19, 26 참조) 그런 ‘부활’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그것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골로새서 1장을 보겠습니다. 6절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그 은혜’가 바로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듣고 복음, 즉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고난받고 죽으신 뜻을 알았을 때, 이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를 깨달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내 모든 죄, 지난 죄와 훗날 지을 죄까지 전부 사해 주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 그 속에 있는 은혜에 대해 전부 다 알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교제 속에 맡겨져 있습니다. 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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