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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 각색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 복음서를 읽으면서 9회, 마태복음 4:23-25, 2001. 2. 17. 강연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 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태복음 4:23-25)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다이 내용은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행하신 초기의 행적들에 대한 기록으로, 짧지만 상당히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 내용을 읽으면, 오늘날도 이렇게 병 고치는 기적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기적을 한 번쯤 겪어 봤으면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를 믿는 것에 인간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나타난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오셔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병자들은 수동적이고 힘이 없어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건강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에 대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이 먼저 예수를 따를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마 9:12-13, 막 2:17, 눅 5:31-32 참조)     이러한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이 많은 병자들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대등하게 설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험한 병에 걸린 사람은 병이 낫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건강에 대한 바람은 약한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 행복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세상에 살면서 모든 것에 만족하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하디 약한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을 바랍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은, 마치 병이 나아 건강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 병자에게 의사가 의술을 베풀어 병을 고쳐 주는 모습과 참 흡사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갈릴리 지방에 다니면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을 때, 그 부름을 받은 사람들 중 중풍 병자, 소경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처지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불행에 처한 이 사람들에게는 바라볼 수 있는 대상,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우리는 예수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이들은 대대로 이어 온 어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배를 타고 다니면서 물고기를 잡는다든지 그물을 깁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을 때, 이들은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것은 사명, 곧 어떤 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삶의 방식을 바꾸게 하는 대진리를 보여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마 4:18-22 참조)   그런 제자들에 반해 이 말씀에 나타난 각색 병든 자나 중풍 병자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따르려 해도 힘이 없는, 한계에 다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부름을 받고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지만, 이 사람들은 일평생 병을 앓았던 병자의 모습으로만 나타납니다.   시편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90:10)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병과 수고와 슬픔은 우리의 수한이 다 찰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사람의 생애에는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 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태복음 4:23-25)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방이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지입니다. 데가볼리*는 ‘열 고을’이라는 뜻으로, 이곳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곳에는 중풍 병자처럼 움직일 수 없는 사람, 간질 병자처럼 언제 발작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 귀신들린 사람, 귀신에 홀려 자신도 모르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 등 온갖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늘날 종합병원에나 모여 있을 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런 내용은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먼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언가 부족하고 완벽하지 못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 내용을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제자들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 내용과 비슷한 양상의 구약성경 내용들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희로애락을 누리고 살던 과거 어느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아주 먼 이라크 지역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조용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말씀과 표현은 다릅니다만,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배나 그물이나 아버지까지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처럼 아브라함도 하나님으로부터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받고 아버지와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갔고, 도중에 자기 아버지가 죽은 후 이스라엘 땅, 곧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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