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 북미지역 성경탐구모임, 2008. 12. 26 강연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일서 4:10)
하나님의 힘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구약 성경 레위기나 민수기 같은 책들을 보면 율법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부터 시작되는 일곱 절기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 크리스마스라고 하지만 그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그런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지키고 살아가야 할 절기와 그들이 어떠한 곳을 향해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때마다 나침반처럼 이스라엘을 향해 고개를 돌리도록 만드는, 엄청난 힘을 지닌 말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부모 세대는 복음 전하는 일에, 성도들 간의 교제가 활성화되는 일에 힘과 시간을 보태며 일평생을 살아왔는데, 자녀들은 그러한 부모에게 섭섭함을 느껴 왔다며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곁길로 가는 것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모든 문제들은 부모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자녀들도 많습니다. 저 역시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닥쳐올 때마다 도망가고 싶었고, 피하고 싶었고,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원망이 나오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체의 생명을 피에 맡겨 두셨고, 그 피는 가야 할 길을 알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이탈되어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했을 때는 몸에 문제가 생깁니다. 몸의 각 지체에는 피가 연결되어 있는데, 대동맥, 세동맥을 거쳐 가장 마지막, 마치 좁은 문과도 같은 모세혈관을 통과하여 세포에 필요한 산소를 옮겨 줍니다. 그런데 그러한 피가, 그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는 질서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삶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복음을 깨달은 뒤 복음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마음속에는, 세상 어떤 것보다도 자신의 자녀들이 같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분명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은 구원받았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과 행동이 교제에서 멀어져 있는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 부모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자식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다.’는 핑계를 댑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방법이 무정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13:24) 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식을 징계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보면 ‘앞으로는 혼을 좀 내야겠구나.’라든지 ‘이제는 부모님이 내리는 벌을 달게 받아야겠다.’는 식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땅을 밟고 살아가면서 그 땅의 표면만 보듯이 그런 얄팍한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탐구하고, 보석을 찾듯이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이유에 대한 답을 이 성경 속에 내 놓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신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을 개인에게만 적용시켜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거기에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절기들이 있고, 그 절기에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다 지키며 살지는 않습니다.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절기들 중 하나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1년에 한 번, 해의 첫 달에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 성전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지금 성경을 알고 거듭난 이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답답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들은 지금도 그 절기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삽니다. 성전이 무너져서 예루살렘에 성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회당이라는 곳에 모여서 나름대로의 율법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이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읽고 그 사실이 확실히 마음속에 믿어졌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들은 자신과는 별로 관계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난 많은 내용들은 우리 모두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좌표가 되고 살아가는 방법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밥상에 올라온 반찬 골라먹듯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과연 나는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일 년 365일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선택을 해야 되는데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들어 핑계를 대며, 부모의 바람에 따라 교제하는 자리에 한 번씩 참석하는 것을 큰 효도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날 세리와 바리새인이 각각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도 반드시 바쳤다며 하나님 앞에 실컷 자랑을 했지만 의롭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하나님 앞에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칭찬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눅 18:9-14 참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내용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에 붙잡혀 산다, 성경 말씀에 이끌려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생활을 할 때, 열두 지파가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성막을 세워 제사를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구름 기둥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성막을 걷고 구름 기둥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성막을 걷을 때도 우리가 집에서 옷을 개듯이 접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방법으로 이것을 옮겼는데 행렬의 제일 앞에는 누가 서고 걷은 것을 어떤 천으로 덮을 것인지 천의 색깔까지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엄청난 질서 속에서 그들이 움직이기를 요구하셨고, 거기에는 어떤 타협도 없었습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무조건 가야 하는 것이고, 가기 싫으면 혼자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연습시키는 방법이었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성경의 위대한 지혜에 대해 이야기하며 살아가지만, 문제는 그것이 현실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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