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독 베를린 수양회, 로마서 11:25-36, 1976. 11. 15 강연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로마서 11:25-36)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재림성경은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부활, 성결과 같은 문제들을 많이 다룹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도 중요하지만 로마서 11장 25절부터 36절까지의 내용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자세히 보면 1,900여 년 이상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시기만은 초대교회조차도 알 수 없었습니다. 또 그 후 세대가 계속 지나오는 동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가 언제쯤일지 그 당대에 확실히 알았다면 기독교인들은 상당히 게을러졌을 것이고, 또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세로 살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잘못된 길을 걸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감추어 오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오실 날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또 앞으로도 모를 것입니다. 앞서 간 성도들이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찬송가 410장) 하는 찬송가를 불렀듯이 지금 우리들도 그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가 되면 꼭 한 번씩 주님 오실 때가 되었다며 떠들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상한 교리를 전파하고 이상한 단체들을 만들어 갔습니다. 세계적으로도, 한국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자기들이 상당히 잘 아는 것같이 떠들었던 단체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가 이미 왔다거나 예수 대신에 다른 누가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정치 기관이나 단체 같으면 이상한 것들이 들어왔을 때 정리하기라도 할 텐데, 종교 기관이니 누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 로마 교황청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면 그런 것을 처리했겠지만, 신교 자유 운동이 일어난 이후에는 그러한 괴상한 무리들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현상도 하나의 자유의 물결을 타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뚤어진 교리들이 생겨났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이 없는 일이 되거나 흐리멍덩해지지는 않습니다. 재림은 틀림없이 있을 사실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어느 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함부로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1,900년의 긴 기독교 역사를 이어 오시는 동안 주님은 때에 맞춰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하시는 시기는 우리 시대의 사람도 모르고, 앞서 간 성도들도 어떤 정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앞서 간 성도들이 주장한 것이나, 잘못했던 것, 잘했던 것을 종합해서, 무엇이 어떻게 되어 왔는지를 어느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1,900여 년 전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타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만, 그들은 주님 오실 날만 기다리기보다 그날을 준비하는 자세로 살았어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말씀을 좀 더 귀담아 들었더라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면, 당대에 주님이 오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세계관이 달랐고 지구에 대해서나, 이 넓은 땅덩어리 위에 얼마나 많은 나라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 성경 시편을 보면, 온 세계가 주님을 찬양한다든지 온 만민이 주를 우러러본다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안쪽, 혹은 인근의 몇 나라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로마 제국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야 된다는 내용의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세상을 아주 조그마한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신개척지를 더듬어 찾았습니다. 땅이 하나도 없는 줄 알았던 망망한 대해를 배를 타고 건넌 후에 새로운 땅을 발견했고, 처음 밟은 땅에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인디언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이 요원한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문센이나 리빙스턴 같은 사람들의 개척 정신에 의해서 북극이든 남극이든, 아프리카 대륙이든 어디든 발견되었고 개척되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 복음은 신실하게 끝까지, 끈질기게 지금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했고, 그 결과 우리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긴 세월 복음이 전해져 가고 있는데, 어느 한 시대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다면, 과연 예수님 말씀이 맞아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 주님이 오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전에 세상이 끝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1914년에 예수님 오신다고 해 놓고 전쟁이 터졌다든지 하는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어느 교파에서 예수님이 오신다고 경주의 어느 산 위에 모여 옷을 벗고 있다가 자신들이 부끄러워서 내려왔던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종류들이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묵묵히 죽어 갔고 또 사라졌지만,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살전 4:16-17) 라고 했습니다. 또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27), “밤에 도적같이 오리라” (살전 5:2 참조) 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이 말씀들이 도대체 알쏭달쏭하여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사람들마다 혼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혼동하도록 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나타내신 말씀을 사탄이 이용할까봐 주의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귀는 선악과가 에덴동산에 덩그렇게 달려 있으니까 그것을 재빨리 발견해 아담과 하와가 따먹도록 만들었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그리스도 탄생에 관한 비밀은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보아도 그 내용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또 그리스도가 오시겠다는 약속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중심에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참으로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던 사람에게만 그 말씀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악을 범하고 다른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살면서 괄시를 받았습니다. 그 괄시의 억울함을, 그 받았던 욕을 분풀이하고 다른 민족들을 짓밟아 버리겠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정작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육신적인 다툼과 육신적인 혈통에 대한 투쟁만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낮추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리스도를 맞이했습니다.
그와 같이 기독교의 복음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 중에는 십자군 전쟁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것을 진리의 투쟁같이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기독교 역사가 인본주의 사상으로 흘러가도 그것이 옳은가 싶어서 그대로 믿은 사람들도 있고,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부활에 대한 사실이 극단적인 이단으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도 그것을 인정하고 옳게 여기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경을 옳게 보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거짓된 것은 끝까지 거짓된 것으로 구별할 줄 압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 살아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많은 복잡한 의논들과 구구한 교리들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만은 계속 묵묵히 전해져 왔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에는 교묘하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흐리멍덩하게 만들고 또 그것에 대한 신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사람들이 성경을 마음대로 흔들고 자기 멋대로 주장하도록 만드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돕기보다 오히려 망치려고 달려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않고 성경을 볼 경우,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초대 교인들도 속은 것이다. 초대교회 때도 예수님이 오실 줄 알았지만 오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재림은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재림이다.’라고 하는, 마귀의 화신이 덮어쓰인 어느 신학자들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처럼 기독교 정통 간판만 들고서 혀를 아무렇게나 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빙자해서 떠듭니다.
그러나 성경을 정확히 들여다보면 주님의 재림은 언젠가 한 번 있을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아무 목적 없이, 뜻 없이, 맹목적으로 오실 주님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7-8 는 말씀이 있고, 이 말씀대로 온 세상에 전파되는 증인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탄생시키기 위한 준비의 말씀, 구약 말씀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권위를 둔 계획 가운데에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전 세계적으로 흩어졌다가 자기 조국으로 돌아올 것이 있었습니다. 그 행진이 강해질 때, 그들이 자기 조국의 밭을 갈고 심고 포도원을 가꾸고 많은 상품들이 외국에 팔리고 할 때, 또 그들이 전 세계의 재산을 끌어 모을 때, 또 그들이 세계의 으뜸가는 국민으로 진출할 때, 전 세계의 교회가 한 역사를 이어서 그리스도의 지체의 형상을 충분히 이루어 갈 때, 세계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고 있는 중에 한 민족이 얼굴을 들고 교회가 마지막 시대를 내다보고 있을 때, 이렇게 성경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예언들이 이루어져 갈 때, 언젠가 갑자기 주님께서 오십니다.
다니엘서 12장에는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1절) 하는 말씀이 있고, 그 다음 2절에서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3절) 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이 더한다, 빨리 왕래한다 하신 이러한 모든 말씀의 예언이 현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4절 참조)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말씀이 성취되고 이루어지기 전에, 중간에 갑자기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고 아는 것입니다.
기찻길의 긴 레일은 하나하나 토막 난 것들이 이어진 것입니다. 기차가 그것을 밟고 지나갑니다. 그 하나하나의 토막들 사이에 조금씩 틈이 난 것을 이으면 수십 리, 수백 리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도께서 혼자 오지는 않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실 일, 성령께서 하실 일, 교회 역사가 진행되고 계속 전파된 후 마지막에 성자께서 다시 오실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들여다보면, “전에도 계셨고” ‘아버지’, “이제도 계시고” ‘성령’, “장차 오실 자” ‘그리스도’ (계 4:8 참조) 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완성시키는 마지막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 성경을 들여다보고 성경 안에서 우리 세계관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먼저 로마서를 찾은 이유는 성경을 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사실이 상당히 밝혀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인만 되면 다 된 것으로 여기고 적당주의로 넘어가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유대인에 대한 내용인지 이방인에 대한 내용인지 조금 구분을 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로마서 11:25)
여기에 “형제들아”라고 한 것은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하는 말에서 ‘이스라엘’은 영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육적인 혈통을 이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함으로써 이 한 구절에서 혼동을 일으켰습니다. “형제들아” 하니까 이 ‘형제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다음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나올 때 이것은 또 뭐라고 보아야 합니까? 같은 성경이지만 성경을 보고도 취해서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상당히 많습니다. 2, 3백 년 전 사람들이 써 놓은 케케묵은 주석 책을 가지고 끝까지 고집을 세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라고 했습니다. (딤후 2:15 참조) 여기서 로마서 11장 13절을 잠깐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바울은 어디 사람입니까? 유대인입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로마서 11:13-15)
유대인을 버리는 것이 너희 구원의 기회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사도의 직분을 맡은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골육, 즉 유대인들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 얼마를 구원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원했기에 그런 마음까지 가졌겠습니까.
이 서신을 받은 로마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이 서신을 받은 복음을 깨달은 로마인들은 이때 자기 동족들에게 굉장한 위협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훗날 로마의 원형극장 안에서는 항상 피가 튀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피였습니다. 언제든 잡히기만 하면 로마 형틀에서 사라져 갔고 또 사자들에게 찢겼습니다. 이 일을 견디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과거에 왕궁에서 살았던 사람이든 귀족 출신이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살 길을 찾아서, 로마 대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벽돌을 만들려고 흙을 파낸 땅굴 속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 그 대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생겨난 땅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몇 세기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유명한 카타콤 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조금 정신 차릴 수 있도록 편지를 보낸 것 같습니다. 로마서 11장 1절부터 2절까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 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로마서 11: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느뇨” 한 이 말에 ‘영적 이스라엘’을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유대인, 즉 이스라엘 민족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로마서 11:2)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은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지, 칼뱅이 주장하던 교리처럼 ‘미리 창세전에 예정하신 예수 믿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분명히 아브라함 후예들입니다.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로마서 11:2)
그래서 바울은 엘리야를 들어서 이야기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자기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 하나밖에 남지 않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7천 명이 있다는 것을 그에게 보이신 것처럼, 바울 자신이 구원받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중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장 25절을 보면 위의 말씀과 상반되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바울이 왜 이렇게 말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어떤 설교집을 보거나 설교를 들으면 상당히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고 서론, 본론, 결론이 잘 나뉘어 사람 눈과 귀에 쏙 들어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꼭 동문서답 격으로 여기에서 이 말 하고 저기에서 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사 34:16) 고 했습니다. 로마서를 1장부터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두서없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말씀을 조금 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욕심 같으면 전부 다 알아야 되지만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예의를 배워서 될 수 있으면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도 귀에 안 거슬리고 잘 들리도록 만들려고 꾀를 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5) 하신 말씀과 같은 상황이 역력히 드러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읽어 보면 그 온순한 세례 요한도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도 했습니다.(마 3:7 참조) 예수님도 마음 좋으신 분이신 줄 알았더니 성전 안에 들어가서 돈 바꾸는 상을 다 엎어 버리고 채찍을 휘둘러 다른 사람의 짐승을 다 쫓아 야단이 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요 2:13-16 참조) 예수님은 위선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바울도 누구 누구는 진리에 대해서 그릇되었다고 하면서 이름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딤후 2:17-18 참조) 과거 주님의 일꾼들은 목숨이 걸린 일에도 담대했습니다. 바로 앞에 칼이 놓여 있어도 까닥하지 않고 그대로 증거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제 다시 로마서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했는데, 이 비밀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비밀은 인간들의 비밀보다 차원이 높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그분이 어떤 분 같습니까? 외형만 보는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실족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별로 탐탁지 않게 보기도 합니다. 또 예수를 보려고 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부터 먼저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아무개 교회 장로가 보기 싫어서 못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장로 보기 싫어서 예수 안 믿다가 나중에 지옥 갔을 때 그곳에서 그 보기 싫은 사람들 만나면 어떻게 하겠소?’ 하고 물었더니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데는 다른 사람 핑계를 댈 필요 없습니다. 배고파서 다 죽어가는 사람이 남 미워서 밥 못 먹겠습니까? 목말라서 쩔쩔 매는 사람이 남 미워서 물 못 마시겠습니까?
믿는다는 말은 성경에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하는 말씀도 있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고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나 답답해하고 억눌려 살 때, 모든 것이 지옥 같고 답답하기만 하더라도 복음을 깨닫고 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대로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95장) 가 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거꾸로 전하는 사람들은 바깥의 진리, 밖의 자유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자유가 있는 나라도 있고 없는 나라도 있고 또 자유가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는데, 성경 읽다 보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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