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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 엑소더스 9회

레온 유리스     2편  땅은 다 내 것임이라       “...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  (레위기 25:23-24)       8장     50개국이 밸푸어 선언을 비준했다.     1차대전 중에 이슈브의 인구는 터키의 공포정책으로 인해 반으로 줄었다. 전쟁이 끝나자 동유럽에서는 새로운 유대인 학살 바람이 불었고, 박해를 피해 밀려든 유대인들의 세 번째 이민의 물결은 줄어 든 이슈브 인구를 채웠다. 영국은 유대인들에게 땅 구입을 허락하는 선심성 정책을 내놓았다. 때를 놓칠세라 시온 이민협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던 땅을 전부 사들였다. 바락 벤 카난은 두 사람의 토지 구매인과 함께 하이파에서부터 나사렛에 이르는 땅을 구입했다. 이런 대규모 토지 매매는 팔레스타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키바와 루스는 갓난 딸을 데리고 비교적 안정된 쇼산나를 떠나 로슈 피나 북쪽에 새로 건설된 키부츠로 옮겼다. 새 부락은 광명의 샘이라는 뜻인 ‘에인 오르’라고 명명되었다.     유대인들은 시리아 및 레바논 경계와 바락 벤 카난이 그토록 원했던 훌레 계곡 깊숙이 들어간 곳의 땅도 샀다.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텔아비브와 그 밖의 도시도 발전했다. 영국 행정 당국에서도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도로가 건설되고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다. 밸푸어는 예루살렘에 와서 직접 스코푸스 산 위에 세워질 히브리 대학의 주춧돌을 놓았다. 이슈브 중앙협의회와 시온 이민협회는 예루살렘의 새 본부로 이사를 했다. 바락 벤 카난은 이슈브 중앙협의회에 선출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은 대규모 세력 각축전의 중심 무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세력 다툼의 발단은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을 나누어 갖기로 한 비밀협정이 폭로된 데서 비롯되었다. 아랍민족의 독립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중동에서 유리한 입장을 고수해 왔던 영국은 프랑스와의 중동 분할 회의에서 아랍 민족과의 약속을 잊은 채 통치령만 넓히려고 했다. 아랍인들은 당연히 배반 당했다고 생각했다. 영국은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결국 시리아 지방과 석유 저장량이 풍부한 모술 유전은 프랑스 차지가 되었다. 프랑스는 시리아계 아랍인 중 몇몇 부족을 매수해서 팔레스타인에 분란을 일으켜 경계선이 정해지기까지 가능한 한 많은 팔레스타인의 땅을 점령하려 했다. 프랑스에게 매수된 아랍 부족들은 프랑스의 권리를 위한 유대인 축출을 목적으로 유대인들을 공격했지만 유대인들은 용감히 싸웠고, 훌레 계곡을 지켜냈다.     골칫거리는 또 있었다. 메카 태수의 아들이며 1차 대전 때 아랍의 반란을 이끌었던 파이살이었다. 다마스커스에 도착한 파이살은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 신생 대 아랍제국의 왕이며 회교도의 새로운 수반임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그를 쫓아냈고 영국은 바그다드로 간 파이살을 대접했다.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라를 하나 만들어서 그들의 충실한 종 파이살에게 인사를 치렀다. 영국은 이 신생 국가를 이라크라고 부르고 파이살을 왕으로 추대했다. 영국은 파이살의 동생 압둘라에게도 보수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연맹의 승인도 없이 팔레스타인 통치령의 일부를 쪼개서 다른 국가를 하나 세워 그것을 트랜스 요르단이라고 불렀다.     이집트, 수에즈 운하, 모술 유전, 팔레스타인 통치령이 이라크와 트랜스요르단이라는 두 괴뢰 국가의 수중에 있었다. 바락 벤 카난, 하임 와이즈만 박사를 비롯한 10여 명의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아랍 세계의 영도자 파이살과 협상을 시작했다. 유대 민족과 아랍 민족은 상호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서로 상대편의 포부를 존중하는 데 동의했다.     영국이 아랍 측에 대해 정부를 조직하라고 요구하자 아랍 내부에는 끊임없는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각종 각색의 토후 가문들은 이해관계로 서로 얽히고 설키게 되었다.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토후 가문은 예루살렘 지방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엘 후세인 일파였다. 다른 토후들은 모두 이들을 두려워했다. 이들의 영도자는 하지 아민 엘 후세인이었다. 그는 부정한 수단으로 예루살렘의 교주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의 귀환이 그의 계획을 세워 나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 후세인은 아랍 농민들을 선동해서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게 만들었다. 그들은 광포한 폭도로 변했다.     또다시 유대인 학살의 선풍이 불었다. 그들은 자위능력이 있는 유대인들의 도시나 키부츠(공동 농장) 대신에 사페드, 티베리아, 헤브론, 예루살렘과 같은 성지의 방위력이 없는 늙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폭동이 일어났을 때 아키바의 아내 루스는 쇼샨나에 갔다가 에인 오르로 돌아오기 위해 티베리아에 들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아키바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렇게 비탄에 잠긴 사람은 아무도 전에 본 일이 없었다. 바락은 에인 오르로 달려가서 동생을 텔아비브의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밤낮으로 동생을 감시했다. 아키바의 가슴 속에는 평생 아물 길이 없는 깊은 상처가 크게 입을 벌리게 되었다.     극심한 폭동이 영국의 눈앞에서 일어났건만 영국인들은 아랍인들의 눈치만 보기에 바빴다. 살인자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책임이 하지 알 후세인에게 있음이 밝혀졌지만 그 책임은 불문에 붙여졌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은 유대인 이민의 수를 ‘경제가 허락하는’ 한도로 국한한다는 정책을 백서로 발표했다. 윈스턴 처칠은 통치령의 반을 쪼개어 트랜스 요르단을 만들어 내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     이것은 이슈브에 있어 한 시대의 종언을 의미했다. 이슈브 중앙협의회와 시온 이민협회는 텔아비브에서 비밀회의를 소집했고 50명의 이슈브 유지가 회의에 참석했다. 하임 와이즈만 박사도 런던에서 달려왔다. 바락도 참석했고 아직도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키바도 참석했다. 이차크 벤 즈비도 참석했다. 다비드 벤 구리온이라는 굵고 작달막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짙은 눈썹의 제2 이민의 지도자도 참석했다. 많은 사람들은 구약을 잘 인용하는 이 정열적인 시온주의자가 앞으로 이슈브의 영도자가 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제3 이민으로 온, 대머리에 네모난 체구를 가진 아비단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아비단은 러시아 육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경력이 있었다.     바락 벤 카난이 회의의 개막을 선언했다. 바락은 유대인으로 태어난 탓으로 몸소 겪은 불행을 열거했다. 지금 그들이 박해로부터 해방을 찾은 단 하나의 땅에 유대인 학살의 선풍이 분 것이다. 의견은 셋으로 뚜렷이 나뉘었다. 첫째는 하임 와이즈만 박사를 선봉으로 한 파로서 영국의 통치령에 속한 만큼 영국과 절충해서 모든 일을 풀어나가자는 파요, 둘째는 아랍측을 자극해서 분규가 더욱 일어나게 한다는 이유로 유대인의 무장 자체를 반대하는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들이었다. 셋째는 아키바가 주동이 된 행동파로서 영국의 보호니 선의니 하는 따위는 환상에 지나지 않으니 유대인들의 힘으로 즉각 아랍에게 보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아랍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협상이니 번지르르한 문서니 하는 것들보다는 총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사고방식 가운데 벤 구리온, 벤 카난, 아비단 및 그 밖의 여러 지도자들은 현실적인 중간노선을 제의했다. 이들은 무장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유대인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어 가기를 원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무장하고 비밀리에 민병대를 훈련하기로 결의했다. 이 군대는 방위라는 오직 한 가지 목적, ‘자위’만을 위해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 군대가 존재하는 동안 이슈브의 공식 기구에서는 그 존재에 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그 성장을 위해 비밀리에 협조키로 하였다. 유대인은 이 비밀 무장단체를 가짐으로써 은근히 아랍족을 견제하고 영국과 협상하는 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전사 아비단이 이 새 비밀조직의 영도자로 선출됐다. 그들은 이 기구를 하가나(자위군)라 불렀다.     제3 이민의 사람들은 새로 구입된 예즈릴, 샤론 계곡, 사마리아, 유다의 산, 갈릴리 그리고 남쪽의 사막까지 진출해 오랜 세월동안 잠자던 땅을 다시 깨워 일으켰다. 그들은 적극적인 농경 방법을 도입하고 수출용 작물을 재배하고 닭과 젖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사해까지 진출한 그들은 4만 년 동안 생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토양을 소생시켜 농산물이 자라나게 했다.     1920년대 중반에는 많은 지역에 흩어진 5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50만 두남(1dunam = 약 300평)이 넘는 면적의 개간된 땅에서 일을 했다. 독특한 성격의 키부츠 운동은 이민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다. 키부츠는 새로 도착하는 방대한 숫자의 사람들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다 키부츠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독립을 위해 싸웠던 많은 여성들은 독립이 되자 사생활이 없다는 이유로 집단생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탁아소 제도에도 반발이 있었다. 키부츠에 대한 불만의 가장 큰 원인은 자기 것이라고 부를 만한 땅을 소유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키부츠 운동에 분파가 생겼다. 그들은 이 분파의 움직임을 모샤브 운동이라고 불렀다. 모샤브에서는 사람마다 자기 몫의 땅을 소유해서 경작하고 공동숙소가 아닌 자택을 소유했다. 키부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샤브에서도 공공의 기능은 집단 중심적으로 관리되었고 중기계는 모샤브 전체의 재산이 됐다. 몇 가지의 기본 농산물을 공공사회 전체가 가꾸고, 농산물의 매매는 중앙기구에서 관리했다. 키부츠와의 중요한 차이는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한계가 좀 더 넓혀졌다는 것과 일가족이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 농장을 마음대로 경작할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최초의 모샤브는 예즈릴 계곡에 생겼는데 가장 험한 습지대와 대결한 이곳의 개척자들은 끊임없이 토지를 개간했다. 모샤브 운동 전체를 볼 때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키부츠와 모샤브는 다 같이 번영해 갔다.     이슈브의 인구가 불어남에 따라서 사회생활도 한층 더 복잡해졌다. 존경받는 노시민 바락 벤 카난은 쉴 틈이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폭동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 공기는 조용했지만 사태는 불온했다. 아랍 폭도들의 잠복 공격과 도둑질에 대한 새로운 소문들은 그칠 줄 몰랐다. 회교사원 교단 위에서의 욕설도 그치지 않았다. 음흉한 예루살렘의 교주, 하지 아민 엘 후세인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9장     1924년의 어느 날, 바락이 예루살렘의 이슈브 중앙 협의회에 다녀와 보니 아부 예샤의 추장 캄말이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의 반가운 손님이었다.     “여러 해 전부터 나는 내 부락민의 길을 찾고 또 찾았네. 이것은 하기 싫은 말이네만 아랍인을 아랍 토후들보다 더 심하게 착취하는 자들은 없어. 농부들의 환경이 나아질까봐 걱정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 그렇게 되면 마음대로 놀고 먹을 수 없게 될 지 모르니까.”     바락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아랍인으로는 무척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나는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돌아와 땅에서 기적을 일으킨 것을 보아왔어. 우리는 종교고, 언어고, 모습이고, 공통된 점은 하나도 없지. 나는 유대인이 결국에 가서는 토지를 모두 차지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 그래도 ... 아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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