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고 했던 마리아의 말처럼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한 번 바뀐 사람이라면 자기 양심 속에 ‘어떻게 내가 이것을 알게 되었나, 참 다행이다.’하는 생각이 한번은 있었을 것입니다. 거듭났다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사는 것이 바쁘고 복잡하다가도 조용히 잠드는 시간이 되면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들리듯이, 내 양심의 소리 속에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높이셨다는 그 안도의 한숨이 있었는가.
내 영혼 먹이시는 그 은혜 누리고나 친히 주를 뵙기 원하네 (찬송가 88장)
여러분은 영혼의 갈함에 대해서 목을 축여 본 적이 있습니까? 빈들에서나 그 장막 안에서 만나 뵌 일이 없는가 (새찬송가 89장)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돈이나 명예로 얻을 수 없고, 학식이나 권력이나 그 밖의 무엇으로도 쟁취할 수 없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자기 영혼 속에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들이 짧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가 410장)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믿게 하셨는지! 단순하게 부르는 찬송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떤 종교인들이 자기의 노력으로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 믿어져버린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오랫동안 종교생활을 하던 열심이 포기되던 날 믿어진 사람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송가 512장)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분주한 중에도 마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없다면 지나간 과거의 추억이 얼마나 애틋하고 그립겠습니까?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옛 터전 그대로 향기도 높다지금은 사라진 동무들 모여 옥 같은 시냇물 개천을 넘어반딧불 좇아서 즐기었건만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청천에 별들이 반짝일 때면 영혼의 안식처 찾아 헤매네밤마다 그리는 그리운 고향 낡아진 창문에 그늘 아니면이 마음 쉴 곳 어디 메이뇨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아무 생각 없이 ‘될 대로 되어라’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살아온 날들을 되뇌어 볼 만한 추억이라는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만, 그래도 한번 참신하게 살아보려 하는 사람이나 깊이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정신 속에는 ‘추억’이라는 재산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과거를 뒤로 한 채 살아온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무엇을 쟁취하러 이 세상에 왔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어느 인류학자도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로서 자녀에게 ‘너는 이렇게 살라’고 할 만한 그런 가치 있는 부탁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칠십 년을 산 다윗은 생을 마칠 때가 되었을 때 자기 아들 솔로몬을 불러놓고 자신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참 멋있는 장면입니다. (왕상 1장 참조)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가 하나님의 정로를 따랐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글을 쓴 것을 보고 과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생활이 즐거운 노래처럼 흘러만 간다면행복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온갖 일 얽히고 답답한 중에도 얼굴에 미소 띄울 수 있다면더욱 보람 있는 생이라 하리니
아렌 가디너라는 사람이 쓴 시인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온갖 일이 얽히고 답답한데 어떻게 얼굴에 미소를 띨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후에 성경으로 인해 제 마음에 변화가 오자마자 그 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들로 행복의 기준을 삼는데 그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일생 가는 그 길에 보호하사완전하고 평안한 곳에 날 걷게 하시네
보이는 것 의지 안 하고 믿음으로내 주와 한 가지 걷는 것 참 행복 아닐까예수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단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나는 믿습니다 (합동찬송가 206장)
과거에 그렇게 서글프고 외로웠던 마음이 어느 날부터 달라졌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소망했던 어떤 바람, 야망, 욕망 그것들이 이루어져서가 아닙니다. 마음속 깊숙이 믿어진 사실,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그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 사는 방법을 하나님 앞에서 찾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부의 의미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사람들은 가난한 것보다 부한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부가 누구를 위해서 주어지는 것인가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하지만, 지혜가 있고 많은 학문을 터득해서 좋은 직업을 갖게 된 것도 부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부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또 어떤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무진 노력을 한 결과 부유한 삶이 시작됐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려니 여깁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그것들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전 2:19 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전 5:11) 하신 말씀처럼 돈이나 명예를 자기가 가져갈 수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무엇인가 하나 주어진 것 때문에 살다가 갈 때에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예비된 한 사실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프로그램 속에 있는 약속입니다. 마리아의 말을 다시 살펴봅시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누가복음 1:52-53)
부자를 공수로 보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손’에는 ‘육신의 손’도 있지만 ‘영혼의 손’도 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악수를 해도 영혼이 지배하는 내 감정으로는 절대로 악수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면적인 자신의 생각과 몸으로 표현되는 동작은 다를 수 있습니다. 손은 맞잡고 있어도 속으로는 ‘싫은데’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반가워하고 기뻐하는 것 같아도 속에는 비수를 가지는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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