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효 | 서울
어느덧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시 90:10) 라는 시편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 나이가 된 지금, 구원받았던 청년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이렇게 기록하려니 마치 한 세대를 지나 희미해진 흑백 사진을 더 희미해지기 전에 복사해 두는 일 같기도 하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사건은 일본 통치 말년에 천황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려고 우리집에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라디오에 심각하게 귀를 기울이던 일이다. 그 당시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집이 동네에서 불과 몇 집밖에 없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우리 집은 중산층의 단란한 가정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러나 광복 후 혼란스럽던 시절을 거치면서 점점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고 난 뒤에는 극한의 가난을 겪게 되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버지의 대단한 교육열과 그에 따르는 나의 향학열, 그리고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결과로 나는 모범학생으로 대학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는 중등 이상의 교육은 가계에 상당한 부담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대학 교육을 받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 여겨지던 시절이다.
작으나마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객관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철이 들면서 내 마음속에는 ‘무엇 때문에 힘겨운 생을 계속 살아야 하는가?’라는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에 도덕 선생님을 괴롭혔던 일이 생각난다. 도덕 시험 평가에 대해서 “어떻게 도덕을 시험 성적으로 평가하느냐”면서 고의적으로 수업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가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도대체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무엇 때문에 계속 살아가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도덕 교육에서 얻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대학 시절에는 두 누이동생들이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며 나에게도 교회에 같이 가자고 종종 권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교회에 가서 얻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목사님은 항상 ‘좋은 일 해라 나쁜 일 하면 안 된다’라는 설교를 할 터인데. 이미 다 아는 사실을 거기 가서 배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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