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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로마서를 읽으면서’ - 2000년 4월 9일 강연   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4월 9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에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로마서 4:19-22)     금보다 귀한 믿음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13-25)     믿음의 결과로 구원을 얻은 후 생활하면서 이 성경을 읽으면 이 내용은 상당히 쉬운 것 같고 알듯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무언가 적극적인 것을 더 요구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다른 적극성이 아니라 성경을 좀 더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적극성입니다. 이것은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확실히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경을 보면, 우리가 아는 그 믿음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의 믿음이 좀 더 성장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믿었었다’ 하며 그 믿음을 과거의 것으로 돌리고 현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서 4장 13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을,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한번 더 가치 있게 살펴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주웠다고 합시다. 그가 다이아몬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유리보다 조금 강한 것 같네’ 할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야, 횡재 했구나. 이제 부자 되었구나.’ 하며 무척 좋아할 것입니다. 또 보석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 원석을 잘 활용할 것입니다. 만일 이 원석을 보석 세공자에게 주면 그는 어떻게 세공할 것인지 설계하느라 생각이 바쁠 것입니다. 즉,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원석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겠다’ 하는 꿈이 많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꿈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 되도다  (찬송가 376장)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 ‘믿음’이라는 것은, 금을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옮겨져서 그분께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먼 거리에 있는 어딘가에 가야 하는데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누가 비행기 표를 준다면 얼마나 고맙고 그 표가 가치 있어 보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믿음은 그런 것 이상입니다.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며 보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위의 구절들처럼 말한 것입니다. 그의 조상이면서 그 민족의 조상, 또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이야기할 때 그가 가진 믿음이 어떠한 것이었기에,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기록해 후대에 남겼겠습니까? 그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그 내용이 전 세계 만민에게 계속 퍼져가면서 읽혀지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몇 장의 편지가 그렇게 가치 있게 설명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말씀이 과연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논하라고 주신 것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야만 하고 없으면 멸망인 그 믿음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복 있는 삶을 쟁취했는가 하는 것을 재확인하도록 이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찬송가는 공중에 사라지는 담배 연기처럼 슥 사라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성도가 분명히 무척 귀한 것을 알았기에, 성경을 기초로 하여 그것을 표현하며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는 귀하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찮게 여겨질지라도 믿는 우리들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며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숨이 멎을 때까지 귀하게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우리의 마음속에 확실한 보배가 간직되어 있다면, 그 보배는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자식이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어갑니다. 세상에 와서 한 몸을 가지고 살다가 끝내 겉은 허물어집니다. 세월에 빛바랜 낡은 창호지 문같이, 풍상에 부서져 가는 초가지붕같이 우리도 낡아집니다. 어릴 적 알던 친구들, 형제들, 부모님 중에는 먼저 간 분들도 계십니다. 집안 어른들은 다 떠나고 없습니다. ‘전에는 어른들이 계셨는데, 이제 내가 이 집안의 제일 어른이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남편이나 아내의 얼굴을 보며 세월이 많이 시들어졌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벧후 1:14) 는 성경 말씀대로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고후 4:16) 라는 말씀대로, 겉은 허물어지고 가야할 때가 왔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가기는 가지만 하나 간직하고 갈 것이 있습니다. 결혼반지나 모아 놓은 재산, 땅문서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영혼이 가지고 가야 할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벧전 1:7) 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을 더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이 로마서 4장에서 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언약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로마서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누구입니까? 영적으로 믿음의 후손인 우리는 제외하고, 먼저는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후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5) 고, 거칠고 강한 일곱 족속이 살던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이 나이가 많을 때에, 한없는 한숨과 걱정뿐인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창 15장 참조) 그리고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에게는 훗날 아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브라함은 부인인 사래가 부탁한 말을 들었습니다. 사래는 자신도 늙었고 남편도 늙은 상태인데, 집에는 튼튼한 종들만 해도 318명이나 되고 양떼도 많고 재산도 많았지만 그런 것들을 누구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이집트에서 데리고 온 자기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마엘이라는 첫째 아들이 태어났지만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본처 몸종의 아들이기 때문에 내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종에게서 난 첫째 아들은 제외되고 비록 늦게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 본 부인인 사라를 통해 주신 아들 이삭이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행위와 상관없는 믿음으로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후 본처를 통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부인이나 자신 모두 급한 마음에 여종을 통해 아이를 낳았습니다.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했던 마음과 같이, 사라와 아브라함이 합작해서 여종을 통해 아이를 낳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는 상속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 했을 때 아브라함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던 때입니다. 세상과 구별의 표시를 가지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행위로는 세상과 구별할 선도 없었고 하나님께서 그런 표시도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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