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17 - 2006년 10월 1일 강연
이 강연은 ‘태초에’ 2006년 10월 1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너희에게 편지하려던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서 1:3)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창세기 4장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안에서만 이 내용을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이 자신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고 동생의 제사만 열납 되었기 때문에 밉고 질투가 나서 동생을 죽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을 읽다 보면 단번에 받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유다가 보낸 이 편지를 읽은 후 창세기 4장을 보면 창세기 4장 내용에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받는 많은 핍박들과 형제자매라는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부딪치는 문제들까지도 생각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유다서 1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1-3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 믿음을 통해서 얻은 구원입니다.
너희에게 편지하려던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3절)
사도 유다는 이 편지를 쓰는 목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서 힘써 싸우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개개인에게는, 어느 날 성경 말씀 앞에 내 마음이 한 번 무너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히 마음속에 심긴 순간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그 순간이 이루어졌을 때의 시간도, 상황도 다르고 들은 말씀도 다르겠지만 한 가지 동일하면서 확실한 것은 어느 날 내 마음속에 지워버릴 수 없는 사실이 심겼다는 것입니다. 단번에 무언가 심긴 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다서에서 말하는 주요 골자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물론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혹시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력을 잃더라도 구원받은 사실은 하나님 앞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성경을 보면 ‘싸움’ 이라는 것도 우리가 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께서 다 싸워주셨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5 는 말씀처럼 이미 승리하셨고,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을 믿고 마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유다는 우리에게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개개인에게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시험들이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 말씀을 확실히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어 침례 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섞여 살다가 정상적인 교제를 가지지 못하고 성경을 혼잡케 보다 보면 마음도 혼미해집니다. 그러다가 ‘어디 가 보니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을 듣고는 거기 가서 듣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11) 는 말씀을 읽고는 ‘아, 구원받아도 또 이겨야 되는구나.’ 합니다. 그러다가 또 침례를 받는다며 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거듭난 후에 또 새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 ‘새 생명’이라는 말은 한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4)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뜻인데, 잘못 이해하여 ‘아, 구원받고도 새 생명을 얻어야 되는가 보다.’ 하고는 잘못된 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그러한 교리들은 우리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생명을 덮어 버립니다. 그 생명의 씨앗을 덮어버리고 자꾸 무언가 다른 것을 심으려고 의심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싸움을 잊으려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에 끌려 가기도 합니다. 사도 유다는 이러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에 대해 경고한 것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 1:4)
이런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예수께서는 이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동의 순서를 정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는 말씀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만으로는 자칫 잘못하면 인간적인 사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행적이나 신약 성경의 여러 부탁의 말씀들을 읽어 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는 이 사랑이 바깥으로 넘치도록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부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 재산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다는 바울의 사상과 다른 많은 사도들의 사상, 성경 속에 나타나 있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생각들이 우리에게도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내 것을 아끼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루어 갈 때 우리는 정상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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