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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 엑소더스 8회

레온 유리스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레위기 25:23-24)       2편 땅은 다 내 것임이라       1장       엑소더스의 싸움은 끝났다. 엑소더스 출항 소식은 순식간에 전파를 타고 퍼져 전 세계 신문의 톱 뉴스가 되었다. 키프로스 사람들의 기쁨은 한이 없었고, 전 세계는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엑소더스의 아이들은 즐거워 할 기운도 없었다. 영국 측은 아리 벤 카난에게 배를 암벽에 대고 어린이들을 치료받게 한 후 보급품도 다시 싣고 배도 손질하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아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팔레스타인까지의 항해를 견뎌 낼 만큼 배를 손질하려면 수일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영국군 군의관들과 배수선공들은 갑자기 바빠졌다.     키티는 카렌이 중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몇 번씩이나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목욕을 하고 제대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열일곱 시간의 단잠을 잤다. 아이들의 회복은 놀라우리만큼 빨랐다. ‘에레츠 이스라엘’ 이 두 마디가 기적을 낳은 것이다.     키티가 카렌의 병실을 다시 찾은 것은 다음날 점심때였다. 잠이 든 카렌 옆에 앉은 키티는 병실에 누운 어린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들은 누굴까? 어디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정말 이상한 민족이다.... 정말 이상한 집념을 품고들 있어. 키티는 카렌의 볼을 쓸어내렸다. 귀엽기도 하지, 정말 귀여워. 키티가 이마에 키스를 하고 머리를 쓰다듬자, 카렌은 잠결에도 미소를 지었다.       키티는 밖으로 나가 부두를 지나 등대 쪽으로 걸어갔다. 쌀쌀했다.     ‘알아야겠어... 알아야겠어.... 알아야지... 알아야지!’ 키티는 몇 번이고 혼자 다짐했다. 해변 끝에 한 남자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키티는 순간 아리를 떠올렸지만, 다비드였다. 그는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작은 돌을 물속에 튕겨 넣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키티가 다가가자 그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샬롬, 키티. 잘 쉬었군요.”     키티는 그의 옆에 앉았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고향 생각해요?” 키티가 물었다.     “그래요.”     “요르다나라고 했나요? 아리의 동생 말이에요.”     다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보게 되겠죠?”     “운만 좋으면 잠시 같이 지낼 수도 있을 겁니다.”     “다비드.”     “예?”     “아이들은 어떻게 돼요?”     “우리가 잘 돌봐줍니다. 애들이 곧 우리의 희망이니까요.”     “위험한 일도 있어요?”     “위험한 일이 많습니다.”     키티는 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하고 같이 떠나십니까?” 다비드가 물었다.     키티는 가슴이 철렁했다. “왜 그렇게 묻는거죠?”     “부인이 우리하고 함께 계시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됐어요. 아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디다.”     “아리가.... 관심이 있으면 왜 직접 가자고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다비드는 소리를 내고 웃었다. “아리는 부탁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비드!” 키티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날 도와줘야 해요. 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것 같아요.”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돕겠습니다.”     “...평생 유대인과는 많이 사귀어보지 못했어요. 당신네를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해요.”     “우리 자신은 더 놀라고 있지요.” 다비드가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할까요? 난 당신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거야 당연하지요.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낍니다. 우리가 ‘동지’ 라고 부르는 소수의 사람들마저도 그렇게 느낀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민족이니까요.”     “하지만 아리 벤 카난같은 사람은 어떻게 된 사람이에요? 그 남자는 누구예요? 어떤 인물이에요? 정말 피가 통하는 인간인가요?”     “물론입니다. 역사가 낳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마 아리 벤 카난의 이야기를 다 하려면, 러시아의 유태인 구역에 살던 시몬 라빈스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마 1884년이었지요.”       2장       1884년 러시아 지토미르     시몬 라빈스키는 평범한 제화공이었다. 그에게는 선량하고 헌신적인 아내 라헬과, 두 아들이 있었다. 막내 야콥은 열네 살이었는데 입이 무겁고 성미가 사나워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대들었다. 비범한 풍모의 맏아들 요시는 열여섯 살이었다. 이 힘 센 거인은 6척의 키와 진홍의 머리털을 갖고 있었다. 야콥이 사나운 것만큼 요시는 유순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온순했다. 사실 야콥의 유능한 뇌가 요시의 억센 육체 위에 붙었던들 초인이 하나 생겨났을 것이다.     유대인 거주 지역 안에서 살고 있는 라빈스키의 가족들은 몹시 가난했다. 이 지토미르의 유대인 거주 지역은 러시아 안에서 유대인이 거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서 1840년에 마련되었다. 말하자면 하나의 거대한 게토였다.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는 돈을 써서 아들딸을 경계선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예외로 하면 다른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 밖의 출입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유대인 거주구역의 설치는 오랜 인종차별 역사를 보면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유대인이 처음 러시아의 크리미아 지방에 거주하게 된 것은 1세기 때의 일이다. 이곳을 지배한 카자르 인들은 유대교에 심취해 이를 자기들의 종교로 채택했다. 사실 카자르 왕국은 하나의 유대인 국가였다. 그러나 10세기에 들어서면서 북쪽에서 권력을 잡은 러시아는 카자르 족을 추방하고 유대인에 대한 행패의 역사를 이루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지배권은 차르(제왕)와 그리스 정교회에게 넘어갔다. 중세기 유대 이단자들은 수백 명씩 한꺼번에 화형대에 올랐다. 무식한 농민들은 유대인들이 마법사이며, 크리스천들의 피를 제단에 바치는 자들이라고 배웠다. 유대인들에 대한 학대가 절정에 달한 카타린 1세 때는 그리스 정교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반 유대 학살행위가 벌어졌고, 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폴란드로 추방되었다.     결국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의 거주지역이 제한되었고, 시몬 라빈스키와 그의 가족들은 그 안에 갇힌 수인으로서 독특한 생활 방식에 적응해야만 했다. 가끔 밖에서 찾아오는 사람은 성스러운 촛대에서 침대와 베개, 구두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들고 가버리는 세리정도였다. 그리고 이들보다는 방문의 횟수가 뜸했지만, 유대인의 피를 찾아다니는 폭도들도 정기적으로 이들을 찾았다.     유대인들은 랍비들의 총체적인 지도 아래 게토 안에서 자치 정부를 조직했다. 수많은 부서와 직위가 생기고, 수십 개의 구약과 탈무드 연구회가 생겼다. 고아들을 돌보는 기구와 가난한 소녀들에게 결혼 지참금을 치러주는 단체도 생겼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생존을 위한 한결같은 움직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더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자선은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열한 번째의 가르침이었다. 학자와 종교 지도자들도 부양했다. 지식의 추구에는 어떠한 방해도 용납되지 않았다.     시몬 라빈스키는 많은 사람들에게 랍비 다음 가는 현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가난한 이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는 지식이 재산의 척도가 되었다. 시몬은 유대 회당에서 집사의 일을 보았다. 그는 해마다 이 유대인 사회에서 한두 가지의 높은 직위에 선출되었다. 아들들에게 마음을 풍부하게 하는 기쁨을 가르치는 것이 시몬의꿈이었다.       쨍그랑!     돌이 한 개, 유대인 구역에 있는 신학교의 유리창을 깨고 날아들었다. 사태를 짐작한 랍비는 얼른 학생들을 뒷문으로 내보내어 안전한 지하실에 숨게 했다. 거리는 쫓기는 유대인들과 쫓는 폭도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대 놈들 죽여라!” 폭도들은 악을 썼다.     “유대 놈들을 죽여라!”     이곳에서 누구보다도 유대인을 미워하는 사람, 곱추 안드레프의 선동으로 시작된 학살 소동이었다. 안드레프는 지역에서 가장 큰 고등학교 교장이었다. 안드레프의 제자들은 게토의 거리를 활보하면서 가게를 부수고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길바닥으로 끌어내 사정없이 매질을 했다.     “유대 놈들을 죽여라... 유대 놈들을 죽여라... 유대 놈들을 죽여라!”     야콥과 요시는 신학교를 나와서 뛰었다. 부모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에 형제는 집을 향해 사람이 없는 뒷길을 달렸다.     집이 있는 거리로 꺾어들면서 형제는 학생모를 쓴 깡패들 -안드레프의 제자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저기 두 놈이 있다!”     야콥과 요시는 집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형제를 쫓아가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형제는 15분 동안 큰 길과 골목길들을 달리면서 도망하다가 어느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쉬는 형제 앞으로 학생들은 반원을 그리며 다가섰다. 한 놈이 눈을 번뜩이면서 쇠파이프로 요시를 후려 갈겼다. 요시는 재빠르게 그것을 막고 그 학생을 낚아챈 다음 한 바퀴를 돌려 머리 위로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쫓아오는 나머지 학생들을 향해 내던졌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항상 호주머니에 돌을 잔뜩 넣고 다녔던 야콥은 돌 두 개로 두 명의 머리를 갈겨 그 자리에 쓰러뜨렸다. 다른 학생들은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형제는 집으로 뛰어가 앞문을 확 열어 젖혔다.     “엄마, 아빠!” 가게 안은 수라장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모친은 방 한 구석에서 오그린 채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요시는 모친을 잡고 흔들었다. “아버지 어디 계셔요?”     “토라!” 모친은 울부짖었다. “토라!”       이 순간, 여섯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시몬 라빈스키가 불타는 회당 안으로 허둥지둥 들어가 연기에 기침을 하면서 성단이 있는 곳까지 간신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십계명이 씌어 있는 포장을 젖히고 여호와의 율법이 적힌 두루마리인 세퍼 토라를 꺼냈다. 시몬은 두루마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헐떡이면서 문까지 나왔다. 화상을 심하게 입은 그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회당 밖까지 나간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드레프의 학생들 스물네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대 놈을 죽여라!”     시몬은 몇 야드의 거리를 기어가다가 두루마리를 몸으로 감싸면서 쓰러졌다. 곤봉이 그의 두개골을 깼다. 구두의 못이 그의 얼굴을 찢어놓았다.     “유대 놈을 죽여라!”     죽음의 고통 속에 시몬 라빈스키는 절규했다. “오, 이스라엘이여! 주는 우리의 신이니라.... 주는 하나이니라!”     사람들이 왔을 때 시몬 라빈스키는 알아 볼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세퍼 토라의 두루마리는 폭도들의 손에 불살라지고 없었다. 지토미르의 게토 전체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세퍼 토라를 지키다가 가장 고귀하게 죽은 것이다. 시몬은 안드레프가 주동이 된 학살 소동에서 희생된 다른 10여 명과 함께 매장되었다.       시몬의 아내 라헬에게 있어서 남편의 죽음은 슬픔밖에는 없었던 그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또 하나의 비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라헬에게서 힘과 의지를 송두리째 빼앗아가고 말았다. 아들들의 위로도 소용없었다. 라헬은 다른 어느 도시에 있는 친척의 집으로 떠나고 말았다.     요시와 야콥은 하루 두 번씩 부친을 위해 기도문을 암송하기 위해 회당에 갔다. 아버지의 평생 사명은 신의 율법을 지키는 일이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생각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한 줌의 떡을 위한 삶이 아니라 신의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인지도 몰랐다. 요시는 슬픔 속에서도 부친의 처참한 죽음의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야콥은 달랐다. 그의 가슴 속에는 증오의 불길이 타올랐다. 진혼 기도문을 암송하러 갈 때도 그는 속으로 복수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는 항상 불안해했고, 자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말을 했다.     동생의 마음을 아는 요시는 야콥을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야콥을 달래고 위로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시몬 라빈스키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후, 야콥은 요시가 자고 있는 한밤중에 슬그머니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는 날카로운 긴 칼 한 자루를 허리띠 속에 꽂고 게토를 나와 유대인을 미워하는 안드레프의 집으로 향했다. 요시는 본능적으로 잠을 깼다. 야콥이 자리에 없는 것을 본 순간 황급히 옷을 주워 입고 동생의 뒤를 따랐다. 그는 동생이 갈 곳이 어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벽 네 시. 야콥 라빈스키는 진주로 된 안드레프 집의 초인종을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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