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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윤두화 | 서울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내 나이 벌써 56, 적게 산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갔나 싶은데 나의 진짜 생일이 지난 지도 35년이나 되었다. 큰 변화 없이 살아온 것 같지만 1975년을 기점으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순탄치 않았던 어린 시절어릴 적 우리 집은 대가족으로, 이층집과 단층집 세 채가 모여 있는 큰 집에서 삼대가 모여 살았는데 그중 내가 가장 어렸다. 매일 북적대는 집에서 심부름도 하고 어른들이 시키면 춤도 추곤 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섯 살이던 해 어느 날, 엄마가 짐을 싣고 집을 떠나셨다. 엄마가 떠나던 당시에는 그렇게 슬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일고여덟 살이 되면서 엄마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나를 엄마가 살고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와 단 둘이 살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대가족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아주 즐겁고 재미있었다.   내가 있던 부산 온천장은 도시이긴 하지만 산과 들과 개천이 있어 자연과 도시가 조화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학교 생활을 하면서 추억을 만들며 나는 야무진 아이로 커갔다. 그러나 다른 가족을 보고 싶어 하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혈육의 정은 끊지 못 하는 것이라며 방학 때면 아버지에게로 보내셨고 가끔은 언니들이 나를 보러 오기도 했다.   엄마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나를 키우려고 하셨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는 엄마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친할머니에게로 가서 살다가 6학년이 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다른 분과 결혼하여 살고 계셨다. 나는 왜 이렇게 두 집을 왔다갔다 하며 생활해야 하는지 궁금했는데, 자라면서 여러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장남인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결혼하여 딸 둘과 아들을 낳고 다복하게 사셨단다. 어느 날 차 사고로 아내를 잃고, 자식을 셋 둔 남자가 혼자 살 수는 없어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다. 재혼하신 상대가 내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9남매 중 셋째 딸로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재처로 시집을 가야 명이 길다 하여 아버지와 결혼을 하신 것이었다. 결혼 후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지만, 사별을 겪고 아이가 셋이나 되는 남편의 아내로 그 복잡한 집에서 사는 것을 힘들어 하시다가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결국 이혼하셨다. 1950년대 말에는 이혼이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잠시 절에 들어가 지내시다가 미용 기술을 배워 미용실을 하셨다.어린 자식을 셋이나 남기고 돌아가신 분의 한은 얼마나 크겠으며, 남겨진 사람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뒤에 엮어진 내 어머니와 나 또한 그러한 운명의 바퀴에 치어 그리 편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었다.   철이 들면서 나는 내 운명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이혼녀의 딸,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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