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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

‘로마서를 읽으면서’ - 2000년 3월 11일 강연   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3월 11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2:28-29)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로마서 2:17-3:2)     우리는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롬 2:16) 는 말씀대로 그날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칫 그 심판의 고통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고 지옥에 대해서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며 가벼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은 무서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심판이 없기를 바라고, 또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이라는 것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하고 지옥에 대한 설교는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후에 지옥에 가느냐 가지 않느냐의 문제에 있어 우리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지금껏 성경을 공부해 왔습니다. 로마서 2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아주 무서운 내용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과 눈은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 둘이 길을 걸어가는데 앞에 절벽이 나타났습니다. 누군가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면 그 말을 들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절벽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벽이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을 믿는다. 멀리뛰기도 해 보았으니 이쯤은 별 문제가 아니다’ 하며 뛰다가 실수해서 절벽에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떨어질 것을 모르고 걷다가 떨어지는 사람이나,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실수해서 떨어지는 사람이나 떨어졌을 때 느끼는 고통은 똑같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무서운 것입니다. 태어난 사실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혼탁해진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았던 그 결과가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질 때가 옵니다. 그 문제에서 벗어나서 사느냐, 아니면 영혼에 대한 책임은 뒤로 미루면서 그저 언젠가 좋은 때가 오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일들, 우리에게 되어질 일들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심각한 훗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 친지들 모두에게 그러한 심판의 날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소망이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가족이 잘되기를 바라고 자녀가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내 주변 사람들이 출세하기를 바라지만, 거기에 더 보태 바라야 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알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로마서 2:16)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아주 함축성 있게 설명된 내용입니다. “곧 내 복음에”, 우리가 받은 복음도 됩니다만 여기서는 사도 바울이 지켰던 그 복음입니다. ‘내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도 바울의 그 복음은 변질되지 않은 복음이었습니다. 남이 함부로 격하하거나 논할 수 있는 그런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일생을 바쳐 ‘이것을 위해서 살았노라’ 하는 간증도 했습니다. 그러한 간증 자체가 로마서를 비롯한 여러 서신들 속에 있습니다. 그 속에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하는 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침해를 당할 때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 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에 다른 것들이 섞여 들어가 잘못될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그 복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 복음에 하나님을 섬기는 율법이나 섬기는 예법 같은 것들을 섞어 복음을 미화시키거나 흐리게 하는 일이 있을까봐 그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이 복음은 초대 교회가 전한,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사도들이 이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또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교제로써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유대인들뿐 아니라 유대인 아닌 이방인들도 여러 지역에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는 먼저 믿은 유대인들이 문제를 삼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며 이방인들에게 가르치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때 사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행 15:10) 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행 15:28-29) 고, 이방인들에게 이것만 가르쳐 주자고 결정했습니다. 이 복음이 흐려질까 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변절되어 갈 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든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1 며, 복음이 변질되려고 하니 그것을 막으려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음을 먼저 알았다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며 큰 짐을 지웠을 때, 사도 바울은 만약 할례를 받는다면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면서 그것을 말렸습니다. (갈 5장 참조)     초대 교회 당시에는 그러한 문제들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복음을 알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에,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셨고 나를 영원히 사해 주셨으니 이제는 ‘하지 않는 버릇’을 길러가려고 합니다. 무엇을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끊었다, 술을 끊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전도하지 않는다, 헌금도 하지 않는다, 성경책도 보지 않는다며,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일축해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영혼들이 구원받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사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해 버리십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정말 이 복음을 사랑했기에 이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조금의 양보도 없이 그것을 위해서 살아갔습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을 안 이후에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한번씩 뒤돌아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이 읽었던 내용인데도 또 새롭게 보일 때가 있구나. 성경을 알려면 아직 멀었구나. 이 성경 속에 하나님의 비밀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세상일에 바빠 이것을 뒤로 미룬 적이 많았구나. &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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