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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 찬송과 함께해 온 나의 30년

  강명자 | 대구   사는 낙을 느끼지 못하고저는 경북 봉화군 내산면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교회라고는 집에서 오리 정도 떨어진 장터에 있는 예배당 하나가 전부였는데 크리스마스 때나 한 번씩 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집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밤에 등불을 들고 찬송을 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때 하도 많이 들어서 제 머릿속에 찬송가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집에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어머니는 혼자 가정을 꾸리셔야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대구에서 한 중학교의 교장으로 계셨던 외삼촌의 권유로 저희 가족은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제 위로는 어머니가 공부를 시켰지만 집안형편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던 미용 기술을 배워야 했습니다. 18세가 되면 미용 기술 면허증이 있으니 남의 업소에서 일할 수 있었는데, 집에서는 직접 해보라고 하셔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개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술자를 데리고 직접 하다 보니 집세에, 월급에 고생만 하다가 몇 년 뒤에는 기술자를 내보내고 저 혼자 하게 되었고, 그나마도 몇 년 뒤에는 가게를 접었습니다. 그 후 한 의류 회사 안에 있는 미용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사 기숙사에는 2,0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머리 손질 없이는 외출하지 않던 때라 기숙사생들이 외출을 많이 할 때는 밤을 새워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는 멋진 정원도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것을 감상할 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고달프고 바쁜 생활이었습니다. 한 주에 하루는 쉴 수 있어서 외출을 나갈 때면 조금 즐거웠지만 저녁이 되어 다시 돌아올 때면 ‘산다는 것이 이것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제 단골 중에 한 아가씨가 항상 포켓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곤 했습니다. 그것을 왜 그렇게 보느냐는 제 물음에 성경을 보면 밤새 일을 해도 부러울 것 없이 생활에 만족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때는 ‘설마 정말 그럴까’ 싶은 마음에 그 말을 지나쳐 버렸습니다.   무리 지어 오가는 기숙사생들에게 어딜 갔다 오느냐 물으면 교회에 다녀온다는 답을 듣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성경을 한 권 사서, 그 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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