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이 광대무변한 우주에 대해서 논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언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사람이 우주의 저 먼 곳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가장 발달한 천체 망원경을 만든다 할지라도, 우주의 끝은 볼 수 없으니까요. 우주는 너무나 넓어서 사람의 힘으로는 다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김소월의 시 ‘초혼’을 읽어보면,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공간’인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우주 공간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넓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찬송가 404장)
그저 우리 눈으로 대충 볼 수 있는 거리나 천문대에 가서 볼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상상하며 이 찬송가를 부르면 안됩니다. 우주는 그 정도의 크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주는 인간의 지식을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단 12:4) 는 말씀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달리기를 잘 하거나 중국 무예인 축지법을 써서 빨리 움직이는 것을 이야기하는가 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속도 말고, 빠르기를 논할 수 있는 속력을 낸 것은 100년이 채 안되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후 지금까지 더욱 빠르고 뛰어난 비행기들이 속속 개발되었지요. 빠른 시절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보다 더 빠른 것을 논하는 시절이 왔습니다. 지금은 비행기가 대기권 안에서 공기의 저항을 받기 때문에 속도의 한계가 있지만, 다음 세대의 비행기는 대기권 밖으로 떴다가 시간을 단축시켜서 내려온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성경 말씀대로 빨리 왕래하는 시절이 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얘들아. 지금은 우리가 해방되어서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얼마 있지 않아 너희들이 다 자랄 때쯤이면 달나라 여행을 가려고 할 거야.”
당시로서는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로켓이 우리를 싣고 50년의 시간이 걸려 달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50년의 시간을 지나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들었어요.
그런데 1969년, 달로 가는 아폴로 11호가 미국에서 발사된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이십 년 전 즈음 어렸을 때에 들은 그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역사는 앞으로 얼마나 더 흐르겠습니까? 과학자들은 긍정적인 견해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부정적이기도 합니다. 과학자들의 기술을 따르자면 지구가 그대로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지하자원들은 고갈되어 가고, 대기권 안의 공기는 심각할 정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또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 우리 상식 밖의 일들도 이 세상에 생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 유럽 전역에 불어닥친 살인 더위로 인해 엄청난 숫자의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산업이 발달된 나라들이 환경재해로 인한 사람의 죽음은 막지 못했던가 봅니다. 인공위성으로 남의 집안까지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세계 최고의 방공망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트윈 빌딩이 무너진 것을 보면 미국의 방공상태도 그리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소련과의 냉전 시대는 가고 이제 평화의 시대가 열린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 테러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현재 미국의 실정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리라 한 성경대로 흐르는 역사
역사가들은 미국의 남북전쟁을 무어라고 논할까요? 같은 나라 안에서 이념 차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까? 이 전쟁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에이브러햄 링컨은 분명 남북전쟁을 주도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봅니다. 그 많은 정적들 속에서도 소신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고, 말에도 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는 링컨이 전쟁터에서 발표한 연설문을 읽어보고는 ‘야, 내가 커 온 사회와는 다르구나. 키만 멀쑥하게 큰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딱 부러지게 주장을 펼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이끌었던 남북전쟁이 아니었으면 미국은 지금 50개의 주로 이루어진 한 국가가 아니라 몇 개의 나라로 나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일인가요? 그냥 흘러가는 역사입니까?
미국이라는 나라는 흑인만 보호하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 각 나라에서 흘러들어오는 이민의 물결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라입니다. 통제가 심하기는 하지만 이민자들을 그대로 받아주는 상당히 앞선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미국이 제일 잘 보호한 민족은 유대민족입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상당한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성경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창 12:3)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 미국이 지금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정도로 부유하게 된 것이 공짜로 된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가 열강의 지배를 받던 20세기 초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는 강대국이었습니다. 영국은 유대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화약 발명이 불가능했을 정도로 유대인과 관련이 깊었고, 유대인들은 영국을 위한 아프리카 금광맥 개발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과 밀접하게 연관된 역사 속에서 영국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의 국가로 현재 아프리카의 우간다 땅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끝까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은 팔레스타인, 즉 지금의 이스라엘 땅뿐이라며 기어코 그 곳에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럽에서 내로라 하고 군림했던 나라들은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유대인을 짓밟은 후에는 속절없이 망해갔습니다. 유럽을 완전히 나치스 제국으로 만들고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독일이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갔을 때에 이탈리아와 일본도 같이 동맹을 맺고 전쟁에 뛰어들었지요. 그러나 그때 일본은 유독 유대인들에게는 호의적이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경계선에 유대인들을 모아 놓고 상당히 대접을 잘했다고 합니다. 미국에 있는 유대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다고 하지요. 또한 독일이 유대인 말살 운동을 일으켰을 때 가가와 도요히꼬, 즉 하천풍언(賀川豊彦)이라는 일본인 종교 사상가는 독일은 망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일본과 독일의 동맹 관계로 인해 그 사람은 끝내 감옥에 갔지만,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참패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한번 뒤돌아보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AD 70년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2천 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유대인들은 결국 1948년,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하신 신명기의 예언과 (30:4)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하신 이사야서의 (43:5-6) 예언이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유대인들 중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당해야 하는가?’ 하는 울부짖음을 내뱉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유대인 한 사람을 놓고 재판을 하는데 그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고, 그의 부인도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마 27:19) 라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점점 더 겁이 났습니다. 예수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 보아도 죽일 만한 죄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 백성들에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요 18:38-39)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라바로소이다” (마 27:21)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라는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는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막 15:12) 고 물었고,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요 19:15) 라고 대답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유대인 자신들이 가장 미워하고 저주하는 시저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한 것입니다.
로그인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볼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