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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로마서를 읽으면서’ - 2000년 2월 12일 강연   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2월 12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서 1:5-6)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1-7)     저는 로마서를 보면 바울은 어떻게 이런 글을 썼을까 감탄하게 됩니다. 그의 과거 행동을 보면 깡패가 따로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러 쫓아다녔고, 잡아서 예수를 욕하게 했고, 잡아서 죽게끔 대제사장들에게 넘겼습니다. 그러했던 사람이 변했습니다.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싫어하던 사람이 새로운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되어 살아간 그의 행적을 보노라면 제 자신이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를 해 봅니다. ‘저도 이 사람이 걸어간 길과 한 발짝이라도 같은 길을 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지금까지 살아오며 해 놓은 것을 살펴봅시다. 무엇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해 놓은 것이 많지 않더라도 그중에 이것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할 만한 것이 있었습니까? 이것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을 하며 살다 삶이 끝나도 괜찮다 하는 마음이 생길 만한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런 것을 한번씩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작정한 그 날부터 평안한 맘 늘 있어서이 복된 말 전함으로 내 할 본분 삼았도다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찬송가 209장)     부드럽게 부르는 이런 찬송 가사가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찬송가 376장)     무엇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직업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 로마서를 쓴 사람은 장막을 만드는, 바느질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 18:2-3 참조) 직업이 어떻든 살아가며 할 일이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살아가는 겉모습보다도 내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그런 변화가 있은 이후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상당히 중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삶을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느 주인에게 예속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위치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보면 고맙고 반가워서이겠지만 이런 찬송도 합니다.     위에 계신 나의 친구  (찬송가 97장)     이런 노래를 부를 때 한번 정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위치를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가 가진 책임감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친구로 삼는다는 내용의 찬송가를 많이 부르는데, 우리 변화된 영혼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것도 좋지만 실제 우리 삶의 모습은 그와 반대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하는 입장으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복음을 깨닫지 않은 사람에게 예수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고 스스로 말씀하신 바와 같은 존재이지만, 일단 성경을 믿고 복음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영생수의 맛을 보고 보혈 의지합니다나의 생명 아낌없이 주께 아주 드렸네 ...   한 번 주께 굴복한 후 성신 주장하시고나의 귀한 보배 피로 나를 정케 하셨네  (합동찬송가 430장)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종’이라는 위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은 ‘노예’이고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십 여 년의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하며 머슴으로 사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의 노래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뿌리’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혹사당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노예는 그런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를 쓴 바울은 종이라고 말하지만, 주인의 혹사에 억압된 종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종이 되어 살아갔습니다. 권력자 앞에 넙죽 굴복하는 그런 종이 아닙니다.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겨우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했고, 그렇게 생애가 완전히 뒤바뀐 사람이었습니다. 그 삶은 참 부러운 삶입니다.   저는 종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그를 보며 참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바울의 삶을 보면 그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종의 삶이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딤후 4:7-8 라고 말하는 종 된 바울의 삶이 얼마나 멋집니까. 그는 자신의 위치를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개인의 위치에 대해 확고하게 ‘나는 이러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살아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꼭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만약 오늘 밤에 내 삶이 끝난다면’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내게는 무엇이 남겠습니까?   이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편지의 서두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그가 살아간 흔적을 보면 그 말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진짜 종답게 살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종은 참으로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설교자라고 해서 제일 위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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