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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태초에” 8 - 2006년 5월 26일   이 강연은 ‘태초에’ 2006년 5월 26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세기 2:1-3)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2절부터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는 이야기로 바로 뛰어 내립니다. 마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셔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시고 궁창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하셨고, 그 뭍에는 씨가 심어졌습니다. 씨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창세기 1장을 통해서 생명의 시작점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3-5 는 말씀으로 우리 앞에 창조의 첫째 날이 공개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빛 외에도 어둠이 있었다는 것, 이 빛과 어두움에 대한 이야기들이 성경 전체를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빛과 어두움으로 나뉘었던 것이 완전히 풀려버린 한 세상이 나타납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성에는 밤과 낮이 없고 어린양이 등이 되어 계신다는 계 21:23, 25 참조 , 창세기 1장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창세기 2장을 공부하기에 앞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빛을 어두움에서부터 갈라내셨습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지만 어두움 역시 같이 있었다는 것을, 창세기 1장을 통해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2장에 나타나는 선악과의 비밀입니다.   그렇게 창조 6일 동안 모든 질서가 잡혀가는 내용이 창세기 1장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4절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는 말씀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은 그 6일 창조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순서대로 나타난 사건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창세기 2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세기 2:1-3)     2장 1절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조 여섯 째 날이 지나고 안식일로 접어들 때 성경은 발표하기를 “다 이루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요? 안식일 전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 (요 19:30)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 시작될 때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연일까요? 모세라는 사람이 쓰다 보니까 우연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라고 쓰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십자가에 못박혀 그 몸이 찢어지고 피를 흘린 예수라는 사람이 이 사건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분명하게 생각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 2:2)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일이 여섯째 날에 모두 끝났다는 생각만 하고 그 다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고 계실 때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식으로는 하루의 시작이 저녁부터이기 때문에, 우리 시간으로 따지면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안식일이 다가오자 유대인들은 시체를 그냥 둘 수 없어 치워달라고 부탁했고 군병들이 십자가에서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와 함께 달렸던 두 사람은 아직 죽은 상태가 아니었기에 다리를 꺾어 죽였는데, 예수는 이미 죽은 상태였기에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시신은 그렇게 내려져서 세마포에 싸였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장사 지내지 않은 어느 무덤에 예수의 시신을 보관했다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끝 부분에 나타납니다. (요 19:31-42 참조)   그런데 이러한 안식일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6-17절)     안식일이 훗날 우리에게 주어질 일의 그림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에는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4:11) 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안식일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창세기 3장에는 하나님께서 안식을 시작하셨는데 창조물인 인간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입니다.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고,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었습니다. 분명히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담에게 들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아담을 찾으시던 목소리였습니다. 창 3:8-9 참조 이것은 쉬고 계시던 하나님의 안식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를 사함 받은 것,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거듭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이루어지니 ...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95장) 라는 찬송가처럼 편한 마음을 맛본 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식일에 대해서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는 이 안식일을 다루는 문제가 종종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기 16장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 한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있었던 일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애굽기 16:2-4)     광야의 여정 속에서 너무 힘든 일들이 닥치니 유대인들은 불평하는 목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짐승들을 몇 마리 준다든가 어디에 가보면 과일이 많이 있다는 식의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렸다고 하니까, 공중에서 떨어지는 메추라기, 이슬같이 내렸다가 굳은 만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뒤에 나타난 내용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시편 119편에는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89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뒷부분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은 먼 데서부터 양식을 가져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31:14 참조)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는 슬기로운 여인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그 먼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 먼 곳에 있는 양식들이 우리 앞에 가져와졌다는 것은 바로 교제를 통해 이 성경 말씀이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함께 의논하며 생활해 나갈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엄청난 말씀들의 모습이, 이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는 음식의 모습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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