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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 2006년 2월 4일 강연 이 소리는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2006년 2월 4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빌립보서 1:27-28)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사람은 살면서 어려움을 느끼거나 의지할 곳이 없을 때, 힘이 없을 때, 또는 육체적으로 약해졌을 때 마음속에서 찬송이 더 강하게 나오기도 합니다. 건강하고 사는 조건이 잘 맞을 때 찬송이 잘 나올 것 같지만, 사실은 약할 때 찬송하는 마음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갔는데 너무 힘이 빠져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글 속에는 육체적으로 힘이 다 빠져서 너무 약해졌을 때 찬송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저도 그렇게 힘이 빠졌을 때 부른 찬송가가 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찬송가 432장)     이렇게 찬송가를 부르고 있으니 내 옆에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하는 것은 내 입으로 나오는 노랫소리였지만, 다른 소리인 것 같았습니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옆에 계신 것 같았습니다. 큰 건물 안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친다고 생각해 봅시다. 쳐다보니 통화하던 그 상대방입니다. 그러면 감회가 분명 남다르겠지요. 전화를 통해 소리만 듣던 사람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과 전화하다가 모퉁이 길에서 마주쳤다면 육성으로 직접 듣고 보게 되어 느낌이 아주 다를 것입니다.     “늘 가까이 계시도다” (찬송가 97장) 하는 찬송가 가사처럼,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하는 찬송가를 불렀을 때 어떤 힘센 팔이 내 옆에서 어깨를 두르는 것 같은 힘이 찬송가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며 육체적으로는 힘에 겨워 약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강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 8:10)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생활 속에 늘 묻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전쟁영화를 보면 제 눈에는 옛날 식의 전쟁이 얼마나 무식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군병들이 군기를 들고 앞으로 전진하는데, 옆에서 깃대를 들고 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북을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계속 총알이 날아오는데도 그런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전진합니다. 기어가도 살까말까 한 상황인데도 총알이 오든 말든 계속 북을 치면서 전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런 바보들이 있나’ 하고 빈정댔습니다. 그 시대에는 훈련을 제대로 못 받았나 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시대는 모든 것의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총알도 빗발치듯 빠릅니다. 옛날에는 총을 쏠 때도 한 번 꺾고 거리를 재어 상대를 겨누어 당겨야 했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것이 느렸기 때문에 그렇게 맞추었는지는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렇게 북을 치고 전진하는 장면은 참 처절하고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그렇게 북을 치는 것은 아군의 사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는 노력을 하고 걱정을 하는 등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 힘을 돋워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이나 직장 등 여러 답이 나올 것입니다만, 생활 속에서 나를 붙잡아주는 힘, 끌어가는 힘이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추울 때 옷을 여러 개 입으면 덜 춥습니다. 그처럼 우리 생활이 어렵고 힘이 빠지더라도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으면 든든합니다. 내가 편해서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의뢰하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를 듣다 보면 이런 시대에 하나님을 모르고도 편히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오히려 모르기 때문에 안정된 생각으로 사는 것일까요? 옛말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가 범을 보면 겁이 나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이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어렵고 답답한 일들이 많습니까?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마 24:6),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 24:7) 한 성경 말씀처럼 지금의 세상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은 성경 말씀과 어떻게 그렇게 딱 맞물려 들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눅 21:35) 하신 말씀과 같은 날이, 아침일지 새벽일지 밤중일지 모르는 그 날이 언젠가 한 날 한 시에 임합니다. 이 세상 역사는 그 날을 향해 톱니바퀴처럼 맞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신앙인인 우리는 희석된 방송이나 뉴스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을 장차 시끄럽게 할 일들이 점진적으로 정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모르니까, 무지해서 겁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 알아도 의뢰하는 데가, 믿는 데가 있습니다. 내 영혼이 세상에 임할 모든 일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찬송가 470장) 하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자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인이기 때문에, 꼭 생각해야 될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들 속에서 우리의 생각이 희석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최후 심판이 있고 그 뒤에 어떠어떠한 자가 불못에 던지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계 21:8)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원히 타는 불못에 던지웁니다. 생각해 봅시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하는 사람만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감동받은 사람이 그 배경이 된 곳을 답사하러 갔다고 해 봅시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답사 다닙니다. 답사한 곳 현지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소설 속 이야기인데도, 그곳에 가면 감상에 젖게 됩니다. 우리나라 영화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요즘 일본 관광객 중에는 한국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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