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유리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같이 너희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편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신명기 3:20)
1편 요단강을 건너서
11장
카렌은 키티에게 행복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던 자신의 지난 세월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고개를 내저으며 울먹이기도 했지만 금새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키티는 그런 카렌이 대견스러워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카렌의 이야기는 길었다.
1938년 독일 쾰른
똑똑한 눈망울과 예쁘장한 코, 입을 가진 일곱 살 소녀 카렌. 학식과 덕망이 높은 아버지 요한 클레멘트 교수는 손꼽히는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독일 내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학생들이나 다른 교수들 속에 파묻혀 밤늦도록 토론을 하거나 서재에서 책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물론 그런 중에도 딸 카렌과 아들 한스를 무릎에 앉혀놓고 책을 읽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렌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인자하신 분이었다.
1937년부터다. 무언가 잘 알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기 시작했다. 꼭 그때부터 집에 손님들이 들락거리던 일도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독일에 어떤 새로운 파도가 밀어닥치고 있었다. 어린 카렌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말 수가 점점 더 줄어들었고 대신 새로운 그 파동을 깊이 응시했다. 아니 파동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눈싸움을 하고 있는 듯했다. 유대인 기업체나 직장인들을 거부하는 일, 공석에서 유대인을 모욕하는 행위, 거리 구타…. 아버지 요한 클레멘트 교수는 독일인이니 유대인이니 하는 구별을 지금껏 평생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독일에서 살았고, 특히 그의 할아버지는 그곳 대학의 전통을 확립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이네, 로스차일드, 칼 막스, 멘델스존, 프로이트처럼 요한 클레멘트 자신도 어디까지나 독일인이었다. 그는 독일을 믿었다. 끝까지 믿기로 했다. 국가의 중요 인물을 함부로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도 넣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대대로 독일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며 살아 온 선량한 요한 클레멘트를 끝내 버렸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1938년 11월 18일
· 2백 개의 유대인 회당이 파괴되다. · 유대인 아파트가 파괴되다. · 8천 개의 유대인 상점들이 약탈당하고 부서지다. · 50여 명의 유대인이 거리에서 살해되다. · 3천 명의 유대인이 심하게 구타당하고 체포되다!
· 금일 이후 유대인들은 직업을 갖거나 장사할 수 없음. · 금일 이후 유대인 자녀는 학교에 출석하지 못함. · 금일 이후 유대인 자녀는 공원이나 놀이터 출입을 금함. · 금일 이후 독일의 전 유대인에 대해 특별 세금 1억 5천만 달러를 부과함. · 금일 이후 전 유대인은 다윗의 별 표지가 있는 황색 완장을 착용해야 함.
사회가 더 이상 험해지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니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던 카렌이 피투성이 얼굴로 돌아왔다. 그때서야 비로소 클레멘트 교수는 사태를 피부로 느꼈고 자신 또한 그 거친 파도 속에 쓸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평생 키워왔던 모든 신념이 흔들렸다. 대신 공포와 두려움, 조급함이 자리를 잡았다.
“당신은 즉시 아이들과 독일을 떠날 준비를 해요.”
클레멘트 교수는 아내 미리암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그는 미친 듯이 베를린으로 달려가서 모사드 알리야 벳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무실은 독일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그는 몹시 피로해 보이는 한 청년을 만날 수가 있었다. 아리 벤 카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독일계 유대인의 탈출 사업 책임을 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인이었다. 아리는 충혈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탈출하시도록 도와드리지요, 클레멘트 박사. 댁에 가 계시면 연락이 갈 겁니다. 여권과 입국 사증같은 것을 구해야 하니까요.”
“나 혼자가 아니오, 가족도 있소.”
아리는 클레멘트 박사의 말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박사님, 당신은 중요한 인물입니다. 당신을 도와드릴 수는 있지만, 가족은 어렵습니다. 도울 수 없어요.”
“무슨 권리로 그렇게 말을 합니까? 반드시 도와줘야 하오.”
클레멘트 박사는 이성을 잃고 쓰러지다시피 했다. 아리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군중들이 안 보입니까? 모두 독일을 빠져나가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아리는 책상 위로 몸을 굽혀 요한 클레멘트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박사님께 독일을 떠나달라고 애걸했어요. 지금은 독일에서 빠져나가신다 해도 영국 때문에 팔레스타인으로는 못 가십니다. ‘우린 독일인이오, 우린 독일인이오. 설마 우리를 해칠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리는 침을 삼키고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잠시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덮여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서 서류 한 묶음을 집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어린이 출국 사증이었다.
“덴마크의 몇몇 가정에서 아이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자제분 중에서 한 사람만 기차에 태우도록 하겠습니다. 기차는 내일 밤 베를린 포츠담 역에서 출발합니다.”
“아이가 셋, 셋이 있는데...”
“제겐 만 명이 있습니다.”
12장
아게와 메타 한센은 덴마크 알보르그 교외에 아담한 집을 갖고 있었다. 아이가 없는 이 부부가 어린 여자 아이를 데려오기에는 꼭 알맞은 집이었다. 한센 부처는 클레멘트 부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았다. 아게의 머리는 희게 세어가고, 메타는 엄마 미리암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었지만 카렌은 그들 부부가 졸고 있는 자기의 어린 몸을 차에 안고 들어간 순간부터 따스한 느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덴마크까지의 기차 여행은 모든 것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기억나는 것은 주위에 있는 어린이들의 숨죽인 울음소리뿐이었다.
마침내 카렌은 아게와 메타가 마련해 놓은 방 앞에 섰다. 방 안에는 인형과 장난감, 책과 옷, 레코드 그리고 그밖에 어린 소녀가 탐낼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득 들어 있었다. 부모의 곁을 떠난 처음 며칠 밤은 참기 힘들었다. 동생 한스가 그토록 보고 싶어진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린 카렌은 상황을 곧 알아차리고 순순하게 행동했다. 카렌은 아게 한센이 좋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파이프를 피웠고,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변호사이며 지도층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다 그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버지만큼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카렌, 네가 우리 집에 온 지도 거의 3주일이 됐구나.” 어느 날 밤 아게가 말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단다.”
그는 뒷짐을 지고 방 안을 거닐면서 카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멋진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는 카렌에게 독일에선 좋지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서 부모님들은 카렌이 얼마 동안 자신들과 함께 지내는 게 제일 좋겠다는 생각을 하시더라고 말했다.
“카렌, 귀여운 아가. 우리는 잠시 널 빌려왔는데, 너를 몹시 사랑해.... 그러니까 너는 우리의 이름을 빌리면 어떻겠니?”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다.
“됐구나! 그럼 카렌. 한센이라고 부르자.”
일 년이 지난 후 카렌은 카렌 한센이 아니던 시절, 덴마크인이 아니던 시절의 일들을 거의 기억할 수없게 되었다. 카렌은 가족의 생사를 모른 채 평화롭고 사랑이 깃든, 풍요롭고 새로운 삶을 천진난만하게 누리기 시작했다. 덴마크마저 독일 통치 하에 들어가 유대인 문제가 거론되기 전까지 세 식구는 맘껏 행복했었다.
1940년 4월, 독일군이 덴마크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덴마크 또한 어쩔 수 없이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독일군의 무단 침입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지하 조직을 만들어 반 독일 운동을 전개하자 독일군은 이에 질세라 덴마크 자국민들을 내세워 조국을 지키려는 지하운동 단체를 말살하려고 했다. 애국자와 매국노의 파괴와 복수극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45년 5월 4일, 마침내 독일의 패배로 종전이 되었다.
13장
메타와 아게 한센 부처에게 있어 이 해방의 날은 슬픔의 날이었다. 그들은 7년 전에 한 어린아이를 큰 위험에서 건져 내어 꽃 같은 젊은 여성으로 길러냈다. 한 없이 귀여운 카렌! 카렌은 귀여움, 아름다움, 웃음이었다. 맑고 즐거운 목소리를 가졌고 춤을 출 때는 발에 마법의 날개를 달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카렌을 더 이상 맡아 기를 수 없다.
한때 메타 한센은 고통을 못 이긴 어느 순간에 절대로 카렌을 내놓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지금 메타 한센은 예의범절을 존중하는 자신의 사람됨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부모를 찾아 돌려보내야 한다는 양심. 해방은 그들에게 장차 카렌 없이 치러야 할 괴로운 밤들과 공허한 생활에 대한 두려움만을 가져왔다. 한센 부부는 지난 7년 동안에 몹시 늙었다. 그것은 전쟁의 긴장이 풀린 순간에 더욱 역력히 나타났다. 전에는 아무리 시련을 당해도 웃을 여유가 있었지만, 덴마크 전체가 웃는 얼굴을 하는 지금 그들에겐 웃음이 없었다. 한센 부부는 그저 카렌을 바라보고 카렌의 소리를 듣고 카렌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두고두고 되새길 수 있도록 카렌의 기억을 머리에 담겠다는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카렌은 그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한센 부부를 사랑했다. 아게는 옳지 않은 일은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카렌은 아게가 입을 열기를 기다려야 했다. 해방 후 2주일 동안 우울한 공기가 짙어갔다. 마침내 어느 날 저녁, 역시 이날도 말 없는 저녁 식사가 끝나자 아게는 식탁에서 일어나면서 냅킨을 내려놓았다. 그의 초췌한 얼굴엔 주름이 잡혀 있었고 목소리는 억양 없이 힘들게 나왔다.
“카렌, 우리는 이제 네 친부모님을 찾아야겠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는 급히 그 방에서 나갔다. 카렌은 그가 나간 그 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메타를 보았다.
“엄마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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