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1 강연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0-22)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
열왕기상 8장은 솔로몬이 언약궤를 옮겨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 전에 솔로몬이 어떤 나무로 성전을 지었고 금으로 무엇을 어떻게 쌌으며 히람이라는 사람을 시켜 놋으로 어떤 것을 만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죽 나열되는 과정에서, 언약궤는 이스라엘 땅 어디엔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언약궤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 올리셔서 40일 동안 말씀하시며 첫 번째 돌판을 주셨습니다. 그 돌판은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깎으신 것으로 십계명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어떻게 성막을 지어야 할 것인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막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야 할 것들부터 어떻게 만들어 나가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돌판을 담을 증거궤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서 바깥쪽으로 나가면서 순서대로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건물을 지을 때 외관을 먼저 짓고 내부를 꾸밉니다만, 하나님께서 설명하신 방법은 인간의 방식과 달랐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역사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한 역사를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한 가족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 역사가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압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족보도 말씀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도 발표하시기 전에 그 민족이 걸어가야 할 길과 또 그 속에서 탄생시켜야 할 한 인물에 대해서 성경에 미리 예고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에 나타나는 약속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동산에 나타나셔서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답했고, 또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창 3:1-15 참조)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한다는 것은 참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누구입니까? 하와와 뱀이 원수라는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구약 성경 전체를 읽어 나가면 이스라엘의 모습이 메시야를 탄생시키기 위한 밭으로 준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한 여인의 모습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해 “내 아들을 불렀다” (마 2:15) 라고 하기도 했지만, 구약 성경 여러 곳에는 이스라엘이 한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에 속한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함으로써 결정된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 아담을 통해 태어날 그의 모든 후손들이 죄인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이미 다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운명을 뒤집어 엎으셔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언젠가 여자의 후손이 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그 발로 이 죄악 세상을 밟을 것을 결정하셨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은 남녀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한 여인의 몸을 통해 태어날 메시야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의 역사를 두고 비추어 보았을 때 ‘여자’는 이스라엘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아담이 만들어지기 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정과 교회의 예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땅에 속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서고 그 약속이 이루어져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자손 중에 한 사람, 노아를 구별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지었고, 홍수에서 자신의 여덟 식구와 짐승들을 보호하여 인류의 역사가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홍수로 인해 전멸했습니다. 노아에게는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 아들들 중에서 셈을 구별하셨습니다. 심장에서 피를 콱 짜면 그 피는 먼저 큰 동맥을 지나고, 가는 동맥을 지나고, 모세혈관을 지나 한 세포를 향해 다가갑니다. 이것이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육체를 이러한 방법으로 창조하셨고 이러한 방법으로 생명의 법칙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불러내셨습니다. 노아를 구별하시고 셈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셈의 아들들 중에서도 에벨을 불러내시고 그 다음에는 벨렉을 불러내셨습니다. 그 가족 속에서 데라가 나타나고 아브라함이 나타납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된다는 말씀에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 있듯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행동 속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피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 짐승을 잡아 그 가죽을 아담에게 입히셨습니다. 아벨도 양의 첫 새끼를 잡아 기름과 함께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다가가는 방법들이 창세기 첫 부분부터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구별되고 구별되는 한 가족의 역사를 자세히 살피다 보면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이 항상 따라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도 그러했고,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역사가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한 조상과 자손의 관계이지만 대를 거쳐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바쳤다는 내용을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먼저 언약의 비석을 주셨듯이, 이 성경을 알고자 하고 바라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창세기에서부터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또 인류의 역사 속에 서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역사 속에 존재하는 가운데, 어느 시점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에 태어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우리 앞에 정확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성전 안에 안치되는 증거궤와도 연결됩니다.
첫 언약인 언약궤의 역사와 새 언약인 예수님의 역사
하나님께서는 마음속에 가지고 계시던 언약을 모세에게 주셨고,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한다는 설명을 하시고는 언약을 새긴 돌판을 가지고 내려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을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서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세는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직접 써 주신 그 돌판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이 일을 보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준 선물을 깨뜨려도 버릇없이 보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40일을 함께 계시면서 말씀하셨고 직접 기록해서 주신 그 돌판을 깨뜨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다윗 왕 때에 두 번째 돌판이 담긴 언약궤를 옮기던 중에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흔들리면서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라는 사람이 그것을 붙잡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셨습니다. (삼하 6:6-7 참조) 언약궤를 보호하기 위해 잡은 것인데도 그를 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도덕적인 잣대로 보았을 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 나가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아 언약궤가 지켜진다면, 그러한 방법으로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대두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창조주는 홀로 영광 받으시기에 충분한 분이기에 사람의 손으로 보호함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잣대로 보면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냉정한 사건들이 성경 속에 나타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이 금송아지를 두고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는 돌판을 깨버렸을 때, 언약의 돌판이 깨어짐과 동시에 한 지파를 구별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는 자신에게 나아오라고 했고, 그때 레위 지파가 다 모세 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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