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 ‘그대 앞에 가는 길’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99년 장편소설 ‘그 바다는 어디로 갔을까’로 삼성문학상을 수상했다.주요작으로 ‘도둑’, ‘버리지 않는 남자’,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나’ 등이 있다.
지난 여름 갑자기
심을 먹고 나서 섬을 반 바퀴 돌고 공항으로 갔다. 기다리던 바울 아저씨가 오셨다. 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서, 여행자처럼 근사한 차림이 아닌, 이웃집 아저씨처럼 소탈하게 웃으시면서 로비로 걸어 나오셨다. 그는 아침에 오기로 했었으나 공항에 안개가 끼는 바람에 비행기가 두 시간이나 연착이 되고 말았다. 이곳은 안개의 섬이다. 때때로 나는 솜털처럼 보얀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안개 속에서 나는 안개가 가늘고 세미한 빗방울들의 모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서울의 안개와 이곳의 안개는 같은 안개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다른 안개였다. 서울의 안개, 그 안에도 빗방울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상큼하게 숨어드는 풀잎 냄새가 배어 있었던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악, 삭, 빠르게 나를 감으면서 지나가는 안개 속에서 나는 손바닥을 허공에 세워보았다. 내 하얀 손바닥에 작은 강물이 흘러내리고 안개비들은 내 머리와 어깨 위로도 흘러내려서 나는 소리 없는 강이 되었다.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 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은 아저씨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몽중산 녹차를 마시면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앞에 앉아서 연못처럼 바다를 보는 일이 그에게는 꿈같은 일처럼 느껴지나 보다. 게다가 내일 보트를 타고 낚시 갈 일을 생각하자니까 아이들처럼 가슴이 설레는 것이었다. 외숙이 만든 흔들의자에서 그는 그렇게 늙지도 않았으면서 할아버지들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하여간에 아저씨의 촌스러움은 알아줘야 한다. 그는 서울에서 이십 년을 넘게 살았지만 피부는 여전히 인도인처럼 가무잡잡했으며 옷도 입을 줄 몰랐다. 언제 보아도 허름한 잠바 차림이었다. 로마시대에 살았던 사도 바울도 그런 비슷한 차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한때 그는 가장 정직한 사도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사람이었지만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삼 년 동안 사막에서 살았다. 사색을 하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기에는 사막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저씨도 한때는 자기 자신은 물론 사람들을 구덩이로 밀어버리는 일을 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해서 다시 건져 올리는 일을 하게 되었지만 자기에게 바울 아저씨라는 호칭은 매우 황송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저씨 기분과 상관없이 우리는 그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바울이 여행했던 사막으로 가 보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아저씨가 사막으로 가는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온다.
아저씨가 한 달만 사막에 갔다 오면 우리는 알아보지도 못할 거야. 너무 어두워서 아저씨가 걸어오면 우리는 밤이 걸어오는 줄 알 거야.
효진은 키득키득 웃었다.
우린 내일 외삼촌과 함께 낚시를 가기로 했어요. 아저씨도 함께요. 작년에는 수형이 형과 갔었는데...?!
오렌지 쥬스를 마시면서 효진은 그 특유의 말재간으로 아저씨에게 대화를 유도한다. 핏줄은 못 속인다. 자꾸만 커 가는 그 애를 보고 있자면 변호사를 꿈꾸었던 외숙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인가? 바울 아저씨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형은 외삼촌의 아들이었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외삼촌의 친아들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외삼촌은 형을 좋아했고 나도 형이라고 불렀어요. 외숙과 형은 꼭 친아버지와 아들 같았거든요. 그리고 형은 낚시 천재였어요. 그래서 나에게 갯지렁이 잡는 법과 릴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어요. 갯지렁이들은 갯가에 돌을 헤쳐 보면 있는데 빨간 게 아주 가늘고 새끼손가락만큼 한 게 움직이고 있어요. 처음에는 너무 징그러워서 장갑을 끼고 잡았는데 곧 나는 그놈들과 친해지게 되었어요. 맨 손으로 그 놈들을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손바닥이 간질거려서 웃음이 나오는 거예요. 우린 그놈들을 모래를 넣은 유리병에 잔뜩 담아놓고 낚시 바늘에 꿰매는 거예요. 녀석들은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듯이 몸을 오그라뜨리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고기들은 살아있는 미끼를 좋아하거든요. 그리고는 새벽에 도둑고양이처럼 바다로 나와서 낚시를 던지는 거예요.
J 박사, 자네는 낚시만 했는가? 마치 물고기 박사 같군 그래.
형이 가르쳐 준 거예요. 형은 천재였으니까요. 그런데 형이 죽었어요. 널파도(너울파도)가 형을 마치 그물처럼 덮어버린 거예요.
효진은 자기 감정에 겨운 나머지 벌떡 일어서서 누군가 커다란 그물을 바다 위로 던지는 듯한 행동을 해 보였다.
널파도가 어떤 것인지 모르죠?
그 애의 반듯한 이마에 분노의 물결이 흘러들었다. 그 애는 손바닥을 펴서 일직선을 만들고 파도처럼 위 아래로 움직여 보이면서 말했다.
그 파도는 일직선으로 밀려와서 높이 솟아올랐다가 부서지는 그런 파도하고는 달라요. 널파도는 전혀 파도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파도가 오고 있는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 파도는 아주 커다란 그물처럼 생겼어요. 화가 난 포세이돈 영감이 그물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아주 가만히 바다가 움직이는 듯하다가 갑자기 집채만한 물결이 일어서면서 바위를 덮치는 거예요. 그러면 바위에서 낚시를 하던 사람들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파도에 휩쓸리게 되는 거죠. 형도 그렇게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어요.
낚시를 했었구나.
아저씨는 물론 다 알고 있다. 그가 시치미를 떼는 것은 효진의 진지함을 보고자 함이었다. 또한 그런 말을 하는 효진의 의미가 무엇인지 관심이 있는 것이다.
아니요. 형은 널파도를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런 날 낚시를 하지는 않아요. 형은 외숙을 찾으러 나갔던 거예요. 어른들은 위험한 날에도 낚시를 하고는 하죠. 그때 외삼촌은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불렀어요. 저기 저 집에 살고 있는 R씨 아저씨가요.
효진은 건너편에 있는 초록색 지붕의 방갈로를 가리켰다.
저 집은 유명한 탤런트 R씨네 방갈로인데요. 그때 R씨가 바다 기슭으로 나왔다가 외삼촌을 부른 거예요, 맥주나 한 잔 하자고요. 외삼촌은 낚싯대를 그 자리에 놓아두고 R씨네 방갈로로 갔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외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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