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2010. 5. 22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6:14-16)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 하나님
성경을 읽다가 읽던 것을 잠시 멈추고 그 내용이 다른 성경의 어느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저는 항상 생각이 두 곳으로 귀결됩니다. 먼저는 창세기로 마음이 돌아가고, 그 다음에는 사복음서로 생각이 넘어갑니다.
우리는 먼저 두 창기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옥신각신할 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아이를 반으로 나누라고 했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왕상 3장 참조) 솔로몬의 그 말은 솔로몬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그 속에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모든 것을 아셨고 모든 것을 보고 계셨던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솔로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고 했습니다. 먼저 어둡고 혼돈하고 무언가 분명히 나누어져 있지 않은 어떠한 상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이라고 하는 그 혼돈스러움 속에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반으로 나누어 각각에게 주어라.”고 했던 솔로몬의 지혜 뒤에 계시던 주인공인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3-4) 고 하셨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있던 것들 중에 어느 것이 좋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그 말씀과 동시에,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빛이 있음으로 해서 빛과 어두움이 나뉘었습니다.
두 여인 중 한 여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 여인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인간의 도덕으로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판결을 내리는 방법은 한 여인의 말은 들어주고 다른 여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누라”는 말만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비밀입니다. ‘이것이 진리인 것 같다, 이것이 진리가 아닌 것 같다’, ‘내가 구원받은 것 같다, 구원받지 않은 것 같다’ 하는 혼돈하고 공허했던 내 마음에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이 들어오는 순간 두 생각은 빛과 어두움이 나뉘었듯이 딱 갈라졌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로마서 7장에 나타나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절) 했던 대로,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동시에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빛이 있고 다른 한 구석에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육신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솔로몬이 내린 판결 속에서 가장 귀해 보이는 것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불쌍히 여겨서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한 그 일에 인간적인 감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보다 먼저 솔로몬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솔로몬은 가장 정확하고도 간결하게 완벽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는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의 사실이 시작되었을 때 나의 뜻이나 의지, 내가 해오던 생각과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선물이 내 마음속에 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내용을 생각하다 보면, 생각은 풀쩍 뛰어넘어서 예수께로 갑니다.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1, 4-5) 고 했습니다. 우리는 빛과 어두움이 부딪히는 모습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한 사람을 설명하는 이 말씀 속에서 또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말씀을 대할 때, 먼저 이 말씀이 누구의 말씀이라는 것을 상고하지 않으면 읽으면서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알면서도 착각하고 읽으면서도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상한 교리들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라고 했습니다. 확실하고도 자신 있는 이 말씀을 예수께서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어디를 펴서 읽더라도 이 성경 말씀은 내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먼저 천지를 창조하셨고 역사를 움켜쥐고 계시고 인간 역사 속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 한 분의 생각과 죽음과 부활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5-16) 고 했습니다.
인류에게 주어진 먹는 문제
성경을 읽다 보면 재미있습니다. 시적인 표현 같고 고상한 표현처럼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내용들을 곱씹어 보고, 신약과 구약 성경을 생각해 봅시다. 또 창조주와 구세주를 생각해 봅시다. 생각의 여행을 떠나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 사람들이 쓰는 글과 마찬가지로 이 내용도 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읽고 가까이하다 보면 그 깊이가 어디까지 빨려 들지 알 수 없는 미궁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행을 하다 보면 답은 예수님이라는 한 분에게로 돌아옵니다. 저는 성경을 보며 솔로몬이라는 한 사람을 앞에 놓고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먼저 사무엘하에 나타나 있는 다윗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다윗에게서 솔로몬에게로 정권이 넘어가서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열왕기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은 먼저 먹는 문제부터 다룹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 한 사람을 동산에 이끄시고 그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1:28) 하는 명령을 가장 먼저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실과는 다 먹을 수 있지만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는 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죄악에 빠지게 된 것도 이 먹는 문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의식주(衣食住)라고 하지만, 실제로 성경을 보면 식의주(食衣住)입니다. 먼저 선악과를 먹었고, 그러고 나니 벗은 것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해 입었고, 동산에서 쫓겨난 뒤 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3장에 솔로몬이 어린아이를 반으로 나누라고 한 그 판결에 대한 기록이 있고 나서 그 다음 4장을 보면 솔로몬의 신하들은 이렇고 제사장은 이렇고 서기관은 이렇다고 죽 나오다가 솔로몬에게 열두 관장이 있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한 달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음식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 6:25) 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솔로몬이 왕으로서 살아가는 생의 순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나중에 솔로몬이 타락했던 것은 무척 아쉬운 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