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 | 대구, 전도인
필자는 40년 전 복음을 깨닫고 전도인의 일을 하며 길 잃은 어린양을 인도하여왔다. 이제 칠십의 고령이 되어 젊은 날 복음을 알던 때를 돌이켜 보며, 주님을 만났던 시간을 새겨 본다.
신의 존재를 깨닫고
내가 처음 신(神)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45년 겨울, 10살이던 때이다. 그해 8월 15일에 해방이 된 후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는데 일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가족들은 애를 태웠다. 그때는 전화나 편지, 전보 등의 모든 연락 수단이 끊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달리 알아볼 방법이 없었고 점을 쳐 보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라면 수단이었다. 어머니는 점 치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여러 일들로 가끔 점을 보곤 하셨다.
그해 겨울, 동네 아주머니 여럿이 의논해서 멀리 있는 유명하다는 점쟁이를 불러 우리 집에서 점을 친 적이 있었다. 동네의 한 청년이 일본 군대에 갔는데 소식이 없어서 점을 쳤는데 그 점쟁이의 입에서 청년의 음성이 그대로 나왔다. 그 점쟁이는 우리 동네에 처음 온 사람이라 그 청년을 알 리가 없다. 그리고 어떻게 여자의 입에서 남자의 음성이 나오며 말씨까지 그 청년의 것과 꼭 같을 수 있었는지 신기했다. 점쟁이는 청년이 죽었다고 했고 방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울었다. 어른들은 죽은 청년의 혼이 점쟁이의 입을 통해서 말한다고 했다. 나는 뒷전에 않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신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내가 13살이었을 때 나보다 10살 위인 형님이 결혼을 해서 형수가 들어왔다. 그런데 형수 방에는 늘 이상한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한글로 쓰인 책인데 많이 낡고 겉표지가 없었다. 한번 읽어보았는데 ‘낳고 낳고’ 라는 말만 계속 나오고 무슨 말인지를 알 수가 없어 재미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책은 신약 성경이었다.
내가 15살이 되었을 때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우리 가족은 3개월 동안 피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17살이 되었을 때 우리 동네에 교회가 들어왔다. 이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에서 기독교가 도입된 나라들은 다 잘 사는 선진국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좋은 것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생각했고 나는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나도 그렇게 불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기에 나도 그렇게 믿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고 하는데 왜 아들을 하나밖에 못 낳으셨을까, 하나님의 부인은 누굴까 하는 등 의문이 많았지만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물어 보지는 못했다.
교회가 들어오니 형수가 나보다 먼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유교에 철저하신 분이라 기독교를 오랑캐 종교라 하셨다. 그래도 형수가 워낙 행실이 올바르고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가도 그렇게 간섭하지는 않으셨다. 아마도 형수의 사람됨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형님도 교회를 다니다가 1952년에 군에 입대했고 하사관이 되어 장기 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때는 한국전쟁이 치열한 때였다. 그래서 집에는 부모님과 형수,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살게 되었다.
제사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고 새벽 기도까지 나가는 모범생이 되었다. 그러는 중 교회를 세웠던 목사님은 부산으로 가시고 후임으로 총각 전도사님이 오셨다. 그분은 율법에 철저하고 열심히 전도하며 성경도 가르치셨다.
나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가장 큰 고민은 제사 문제였다.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는 것은 별로 간섭하지 않으셨지만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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